문재인 대통령은 남평문씨…전남 나주 곳곳에 문씨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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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홍 논설위원 2017-05-17

文 대통령은 남평 문씨 충선공파 24세손…
조상의 바른 말하는 DNA 물려받은 듯 

문재인(文在寅)  대통령의 본관(本貫)인 남평 문씨에 대한 관심이 높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평문씨(南平文氏) 충선공파(문익점) 24세손(孫)이다. 전남 나주 남평읍에는 서원, 유허비 등 남평문씨의 유래와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사적지가 적지 않다.

문 대통령도 시조의 위패를 모시는 장연서원(長淵書院·남평읍 풍림리)을 대선(大選) 출정을 앞둔 2017년 1월 찾는 등 조상에 대한 예를 갖춰왔다. 2012년 대선 출마선언 직후에도 첫 일정으로 이곳을 찾았고, 당 대표 전당대회 선거에 나서면서도 방문했다.

선거에서 종친 등 혈족을 찾고 그 상징성이 담긴 곳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나주 방문은 호남과의 인연을 강조함에 있어서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 지난 1월23일 나주 남평읍 풍림리에 소재한 남평문씨 시조 문다성(文多省)을 비롯한 선조 5인의 위패를 모신 장연서원(長淵書院)을 방문해 유건(儒巾)을 쓰고 배례하는 대선후보 때의 문재인 대통령  


중요 선거를 앞두고 매번 찾았던 장연서원은 남평문씨 시조인 무성공(武成公) 문다성(文多省)을 비롯해 문공유, 문극겸, 문유필, 문익점 등 5인 선조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풍림리에 있는 연못 장자지(長者池)는 시조 문다성의 탄생 설화가 구전(口傳)되고 있다. 서원 부근에는 시조가 태어난 바위라는 의미의 문바위(文巖)와 이 바위를 보호하기 위한 문암각(文巖閣)이 자리 잡고 있다. 민속자료 32호로 지정돼 있다.

남평읍에서 차량으로 3분 거리인 드들강(지석강) 강변도로에는 선현의 자취를 기리는 남평문씨 시조 유허비(遺墟碑)가 석굴형(石窟形)으로 만들어져 있다. 나주시 대호동 체육공원에는 남평문씨 성향비(姓鄕碑)도 세워져 있다. 서원은 장연서원 말고도 전남 장흥군 유치면에 문익점과 문위세를 모시는 강성서원, 문익점 등 5인의 선조를 배향하는 운산서원이 전남 담양군 대전면에 있다.     

▲ 지난 1월 장연서원을 찾은 문재인 대통령이 종친들과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남평에서 차량으로 10분 거리인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에는 조선 인종(1544년)때 문창후가 조성한 방풍림(防風林)이 조성돼 있다. 수해를 막기 위해 조성한 것으로 수백 년이 된 아름드리 160여 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산림청 등이 2003년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선정하기도 했다.

보성군 미력면 도개리에는 충선공 문익점 부조묘(지방유형문화재 165호)가 있다. 부조묘는 나라에 공이 큰 신하에게 국가가 영원히 제사를 모시도록 배려한 것을 말한다.

그밖에 광주광역시 북구 청풍동에 균산 문용현 선생을 기리는 균산정이 있으며 광주 남구 사동에는 부모에 대한 효성을 기리는 쌍효문(雙孝門)이 있다. 장연서원 총무이사 문흥식(60)씨는 "문 대통령이 조상으로부터 힘을 얻고자 할 때 들렸던 곳이 이 서원이었다"며 "마음 졸이며 투표 결과를 지켜봤는데 좋은 결과를 얻게 돼 정말 기쁘다"고 말했다. 

나주·화순·장흥서… 남평문씨 광주·전남 종친들 환호
대선 개표 지켜보며 당선 기원…文 대통령 한때 전남도민
     

문재인 대통령의 본관인 남평문씨(南平文氏) 광주·전남 종친들도 당선 소식에 환호했다. 나주시 남평읍 풍림리에는 남평문씨 시조인 문다성, 문익점 등 시조부터 5대조까지의 위패를 모신 장연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장연서원을 방문하는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조상을 기려왔다. 또 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도 틈나는 대로 서원을 방문해 종친들에게 인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 나주, 화순, 장흥과 경남 합천 등에는 남평문씨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전남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 남평문씨 종친들이 5월9일 밤 마을회관에 모여 대선 출구조사에서 문재인 후보의 당선이 예측되자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있다.     


이번 대통령 선거 운동기간이나 투·개표 과정에서 남평문씨 종친들은 겉으로는 조용한 가운데 뜨거운 마음으로 문 대통령을 성원하는 모습이었다. 문 대통령이 평소 신중한 성격인 점을 감안해 문중 사람들도 조용한 분위기에서 선거를 치르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으로 전해졌다. 투·개표가 이뤄진 5월9일도 분위기는 별반 다름이 없었다. 조상들의 위패가 모셔진 장연서원이 외진 곳에 위치한 탓인지 이곳에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북적거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남평문씨 집성촌 가운데 한 곳으로 80여 가구가 모여 사는 화순군 도곡면 천암리에서는 종친들이 함께 응원하는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개표가 진행된 9일 늦은 밤 수십명의 종친들이 천암리 마을회관에서 함께 TV로 문 대통령의 득표 상황을 지켜보며 당선을 기원했다. 이 마을에 거주하는 문 모(49)씨는 “문 대통령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좋은 정치로 국민의 박수를 받는다면 더 이상 영광이 없을 것”이라며 감격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한편, 문 대통령은 한때 주민등록상 전남도민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희대 재학중 학생운동에 참여했다가 강제 집징돼 특전사에서 군복무를 마친 문 대통령은 1970년대 말 제대한 이후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에서 사법시험 공부를 할 때 거주지로 전입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 통신이 발달하지 못해 예비군 훈련 통지가 안 돼 불참할 경우 처벌을 받았던 탓에 대흥사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주소지를 삼산면으로 옮겨 대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평 문씨 충선공파 24세손  

문재인 대통령은 남평 문씨 충선공파 24세손이다. 문 대통령은 대선 출마 전부터 나주 남평에 있는 남평문씨 종친회를 찾았고, 호남과의 인연을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선조를 보면 목화씨로 유명한 문익점이 있고, 그 위로 충숙공 문극겸이 있다. 문극겸은 약 850년 전, 이의방, 정중부 등 무신(武臣)들이 문신(文臣)과 환관 수백 명을 죽이고, 나중에 왕도 죽여버린  피비린내 나는 무신의 난에 살아남은 몇 안되는 문신 중 하나였다.

무신의 난이 났던 보현원에서 수백 명을 죽인 피에 굶주린 병사들이 개경까지 와서 문신들을 찾아다니며 죽였는데, 문극겸은 운 좋게 개경에서 당직을 서다가 병사들에게 잡혔다. 그는 잡힐 때 “나는 정언(正言) 문극겸이다. 왕이 내 말을 따랐다면 오늘 이런 변은 없었을 것이다. 날카로운 칼로 나를 단번에 죽여라”라고 하니, 감히 병사들이 죽이지 못했다. 정중부가  “그는 우리 무신을 위해 바른말 하였고, 덕망이 있는 선비다”라고 하여 결국 살아남는다.       

▲ 남평 문씨 관련 행사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문극겸이 살아남은 이유는 바른말도 하고, 무신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정중부 등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무식하다고 망신과 모욕을 당할 때도 변호도 해주었고, 문신들의 독주와 횡포를 견제하는 상소도 올렸다. 나중에 허리가 분질러져 연못에 버렸진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의종이 문극겸의 말을 안들은 것을 많이 후회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 변호사였던 것도 조상의 바른 말하는 DNA가 조금 남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 무신의 난을 그렸던 드라마 ‘무인시대’  


문극겸은 이후 무신정권의 최고 실세였던 이의방의 동생 이린을 사위로 맞는다. 이의방과 사돈이 되면서 실세가 된다. 그러다 이의방이 왕의 첩들을 데리고 살고, 왕의 이모를 강간하는 등 악행과 패륜을 일삼자,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이 이의방을 죽인다. 이 와중에 사위인 이린도 죽었다. 그러나 문극겸은 정중부와의 인연으로 살아남았고, 이린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이양무를 빼돌려 수십 년간 숨어 살게 한다. 문극겸의 외손자이자 이의방의 조카였던 이양무는 나중에 무과에 급제했고, 후손들도 무관을 하면서 변방에서 살았다. 그의 5대손이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이다  문극겸은 무신의 난에도, 사돈인 이의방 가문이 몰살당할 때에도 살아남았다. 외손자도 살아남아 그의 5대 손인 이성계는 조선의 왕이 되었고, 직계(直系)들은 살아남아 이번에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문재인까지 연결되었다. 

▲ 충숙공 문극겸의 초상과 묘소  

  
문극겸이 무신에게 함부로 대했거나, 문신들이 모욕과 망신을 당할 때 배려하지 못하고 인간관계를 잘못했더라면, 게다가 바른말과 소신으로 워낙 유명해서, 적들마저 죽일 수 없었던 선비가 아니었다면 조선의 건국도, 문재인 대통령도 없었을지 모른다. 문 대통령도 선조인 문극겸의 청렴하고 바른 소신과 사람을 배려하던 성품을 닮아 바르고 따뜻한 나라를 만들면 좋겠다.      

 

충선공 문익점의 생애와 업적         

 

문익점(文益漸, 1329~1398)의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며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여기서 ‘삼우’는 나라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과 성인의 학문인 성리학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 자신의 도(道)가 서지 않는 세 가지를 걱정한다는 뜻이다.   

 

삼우당 문익점은 1329년 2월8일 고려 강성현(江城縣: 현재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촌(培養村)에서 남평문씨 충정공 문숙선(文淑宣)의 아들로 태어나 성품이 총명하고 온후하며 어릴 적부터 재주가 뛰어나 12세에 대학자인 가정(稼亭) 이곡(李穀)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23세인 1360년(공민왕恭愍王 9년)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정동향시(征東鄕試) 과거에 급제하고 다음해에 경덕재(經德齋·고려시대 국학에 설치한 7재七齋의 하나)를 설립했다. 30세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신경동당(新京東堂)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에 임명되었으며, 공민왕 10년에는 예문관 직강(直講)을 하였고 그 다음해에는 성균관의 순유박사(諄諭博士), 이듬해인 1363년 33세에 사간원 좌정언(左正言)이 되어 서장관(書狀官)으로 원(元)나라에 가는 사신 계품사(計稟使)인 좌시중 이공수(李公遂) 일행과 동행하게 됐다.

 

당시 고려와 원의 관계는 복잡했다. 원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인 최유(崔濡)가 공민왕을 몰아내고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 왕혜(王譓)를 새 왕으로 옹립하려고 했다. 이때 원나라 조정은 원에 머무르던 덕흥군을 지지했던 것 같다. 원의 조정은 최유와 공모하여 원나라의 대신 삭사감(搠思監), 환관 독로첩목아(禿魯帖木兒·토루테무르)와 박불화朴不花·박부카) 그리고 본국의 김용과 내통하여 덕흥군을 고려의 왕으로 세울 계략으로 원나라 순제(順帝: 15대 황제, 재위: 1333(37)~1367(70))의 승낙을 받아냈다. 이들은 명망이 높은 삼우당에게도 동조하기를 강요했으며, 원나라 순제도 그에게 예부사랑(禮部侍郎)이라는 높은 관직을 주면서 음모에 가담토록 권하였다. 그러나 삼우당은 절의를 지키고 이를 거절하였다.

 

실제로 원은 덕흥군을 고려 왕에 봉하고, 군사 1만명을 보내 요동까지 진출했을 정도로 침략 의지가 높았다. 여세를 몰아 1364년 원은 고려를 침략해오다가 고려 장수 최영과 이성계에게 대패하고 말았다. 그들의 음모가 이렇게 실패하자 삼우당은 원나라 순제의 미움을 받아 1364년 11월 교지국(交阯國: 현재 베트남 북부의 통킹·하노이 지방에 해당)으로 귀양길을 떠나 다음해 3월에 적소(귀양간 곳)에 이르렀다.

 

나중에 원 순제도 삼우당의 의견을 듣지 않았음을 후회하고 그를 귀양에서 풀어주게 되었으니 그때가 1366년 공민왕 15년이었다. 순제는 삼우당에게 높은 벼슬을 주겠으니 신하가 되기를 권했으나 본국 고향에 노부모가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줄 수 없음을 간청했다. 그리하여 귀국하니 공민왕이 삼우당의 충의에 감동하여 중현대부(中顯大夫)에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과 지제고(知制誥·조선시대에 지제교知製敎로 개칭)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그해 가을에는 성균관 학관에 뽑히고 그 다음해에는 동관의 사성(司成)이 되었다. 1385년 우왕 11년에는 전의주부(典儀注簿)가 됐고 그해에 청도군사를 강론하였으며 1389년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서 시학이 되어 학문을 위하는 길을 상소로써 논하였다. 이때 이성계와 조준, 이정 등이 전제개혁을 강력히 추진했는데 삼우당은 이에 반대한 이유로 파직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59세였다. 그러나 다시 60세에 종2품 경영동지사(經營同知事)에 임명되었으나 공양왕에게  사직의 운영에 필요한 사무 8조를 올리고 영원히 관직을 떠났다.

▲ 충선공 문익점 초상과 경남 산청에 있는 삼우당 문익점 선생 유허비  

 

관직에서 물러난 삼우당은 원에서 돌아올 때 몰래 숨겨 들여온 목화씨를 재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원나라에서 탐스러운 목화밭을 보고, 나라 밖으로 반출이 금지되어 있던 목화씨를 붓대 속에 감추어 왔다는 일화가 있다.

 

삼우당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함께 씨앗을 심었는데, 처음에는 재배법을 몰라 한 그루만 겨우 살렸다고 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3년의 노력 끝에 대량 재배에 성공했다. 그러나 목화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실을 뽑는 방법이 또 난관이었다. 이는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원나라 출신 승려 홍원(弘願)의 도움으로 해결되었다. 그는 마침 씨를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로써 삼우당은 목화를 재배해 옷을 만드는 기술을 확보했다.

 

당시 부유층은 명주나 모시로 옷을 입을 수 있었으나 평민은 갈포나 삼베로 만든 옷을 입어 겨울을 지내는 고통을 겪었는데 목화로 면포와 솜을 가지고 옷을 입게 되었으니 의류생활의 일대 혁명을 가져왔으며 국민경제는 물론 국가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목화의 가공법은 삼우당의 손자 문래(文來)의 창안이라고도 하고 또는 장인 정천익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고증이 없다. 조선 초기 정종이 사액하고 태종 때 건립한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의 도천서원은 삼우당을 모시고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1375년(우왕 1) 삼우당은 목화재배에 성공한 공을 인정받아 다시 전의주부에 임명되었고, 1389년에는 좌사의대부에 올랐다. 조선시대 학자 남명 조식(曺植)은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 상고 시대 중국의 농사를 관장하던 신)과 같다”라고 그를 칭송했다.

 

목화는 재배에 성공한 지 10여 년 만에 온 나라에 퍼졌다. 목화의 전래는 우리나라의 의생활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켰다. 목화가 국내에서 재배됨에 따라 그때까지 수입에 의존했던 목면과 솜을 스스로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귀족들만 입던 무명옷과 솜옷을 서민들까지 입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목화씨를 추출하여 솜을 트고, 면직물을 만들기 위해 물레와 가락, 날틀 같은 면직 기구를 제작하고 발달시킴에 따라, 생산 도구들이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솜은 옷뿐만 아니라 초나 화약의 심지로도 이용되었고, 튼튼한 무명실은 노끈, 낚싯줄, 그물 등 일상용품으로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무명은 훗날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물물교환 시 통화수단으로 이용되어, 세금을 걷는 기본 통화가 되기도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일본이나 중국과의 무역에서 주요 수출품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삼우당과 정천익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문익점 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남아 있으며,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었다.

 

삼우당은 1392년 섬기던 고려가 망하자  조선조의 여러 차례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두문불출하다 70세인 1398년 2월8일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날 별세하였다. 삼우당의 공로는 사후(死後)에도 인정받아 태종은 참지의부사(參知議府事) 에문관제학(藝文館提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증직하고 강성군(江城君)으로 봉(封)하였으며, 시호를 충선(忠宣)이라하고 부조묘(不眺廟)를 세우라고 명하였다. 세종대왕은 대광보국 숭록대부의정부 영의정을 추서하고  부민후(富民侯)로 추봉하였다.

 

삼우당은 면화 전래의 큰 공적으로 우리나라 백성에게 영원히 큰 은택을 입혔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삼우당의 학문, 충절, 경륜, 효성인데 이에 대해선 대학자 퇴계 이황, 남명 등의 극찬을 통해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삼우당문집』 최초로 번역 발간돼…목화씨에 가려진 성리학자의 진면목 드러나

 

고려 말의 성리학자로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전래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삼우당(三憂堂) 문익점(文益漸)의 문집인 『삼우당문집(三憂堂文集)』이 최초로 완역돼 출간됐다.

 

삼우당문집편찬위원회가 추진하고 허권수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가 번역한 『삼우당문집』은 주석을 포함해 사륙배판 1000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다. 자료수집에서 번역, 발간까지 1년 반 정도의 기간이 걸렸다.

 

『삼우당문집』은 삼우당에 관한 기록을 모두 집대성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사료가 풍부하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동국여지승람』 등 국가사료와 『대동야승』, 『지봉유설』 등 각종 문헌, 『약천집』 등 각종 문집에 실려 있는 삼우당 관련 자료들이 모두 망라됐다.

 

삼우당은 목화씨를 가져온 큰 공로 때문에 고려 말 성리학자로서의 학문적 성과는 가려졌다. 그는 포은 정몽주 등과 함께 고려 말기 우리나라 성리학을 일으켜 조선왕조의 지도이념이 성리학이 되도록 기반을 조성한 인물이요, 고려 왕조에 충성스럽고 유능한 관료이기도 했다. 

▲ 최초로 완역된 삼우당문집  

 

2014년 도천서원 앞에 도천서원묘정비가 건립된 데 이어 2015년에 『삼우당문집』이 간행되는 등 삼우당의 진면목을 알리고 기념하는 사업은 근년 들어 활성화되고 있다. 문집을 편역한 허권수 교수는 “『삼우당문집』을 잘 읽어보면,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알 수 있고, 나아가 지도자가 국가사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밝혔다.                
 
남평 문씨의 연원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고려개국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지고 무성(武成)의 시호를 받았다. 이후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남평을 관향으로 하고 있다.

문다성은 갓난 아기 때 백제 남평현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됐다는 전설이 있으며,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의 장자못가에 문암(文巖)이라는 전설 속의 바위가 남아 있다.

전설에 따르면 472년(백제 개로왕 18년) 남평 동쪽에 장자지란 연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郡主)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문(文)’자가 새겨진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며 군주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대종회에서는 472년(백제 개로왕 18년) 탄생은 고려 개국공신이라는 역사 기록과 맞지 않아 통일신라 말기로 정정하였다. 문다성의 아들 문탁(倬) 이후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하여 1731년 장흥 월천서원에서 발간한 남평문씨 최초의 족보인 신해보(辛亥譜)에서 문익(文翼)을 1세조로 하였고 이후 최초로 합의된 대동보에서도 중시조인 문익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정리하였으며 최신의 대동보도 이를 따르고 있다.

중시조 문익(文翼)은 1098년(숙종 3) 좌찬선대부·급사중으로 임명되었으며, 1099년 요(遼)나라에 가서 원자(元子)의 책명(冊命)을 받아와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승진되었다. 1102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역임하였고, 110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경절(敬節)이다.

문익의 아들은 고려 인종조에 재상이었던 문공인(文公仁)과 문공유(文公裕)이고, 손자는 명종조에 명재상으로 이름난 문극겸(文克謙)이다. 남평 문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8명을 배출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124인의 독립유공자가 나라를 구하는데 헌신하였다. 대종회에선 알려지지 않은 유공자들을 찾고 있다.

 

남평 문씨의 분파는 충혜공파(忠惠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순질공파(純質公派), 의안공파(毅安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성숙공파, 남제공파, 순평부원군파(順平府院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 등이다

문씨도 남평문씨 말고도 본관이 강릉 문씨 등 7개가 더 있다. 문씨 전체 인구는 45만여 명으로 알려졌다. 주요 인물로는 문공인, 문공유, 문극겸, 문유필, 문달한, 문익점, 문명기, 문종구, 문창모, 문선명, 문익환, 문태준, 문병하, 문희상, 문국현, 문규영, 문성근, 문학진, 문재도, 문병호, 문소리, 문대성, 문희준, 문지애, 문채원, 문근영, 문준원 등이 있다.

나주 남평은 영산강 최대 지류인 지석강을 끼고 있는 호남의 대표적 곡창지대이자 천년 도읍지인 전라도의 중심지였다. 이런 만큼 남평을 본관으로 한 성씨도 문씨 이외에 송씨, 반씨, 조씨, 남씨, 김씨 등 15개에 이른다. 
<문윤홍·시사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기사입력 :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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