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인이 나쁜 짓을 하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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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승무 2018-01-25

모든 불의와 부패가 타락한 우리의 본성에서 출발했음을 알게 하소서!     

철인황제(哲人皇帝)이자 로마제국의 5현제(五賢帝) 중 한 사람이었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실질적으로는 팍스 로마나(Pax Romana)의 마지막 황제였던 그의 명저 ‘타 에이스 헤아우톤(Τὰ εἰς ἑαυτόν)’에 나오는 글귀입니다. 우리나라에는 ‘명상록(暝想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알려져 있습니다. 원제(原題)는 자기 ‘자신에게 관한 것’을 뜻하며 자성록(自省錄)입니다.    

아우렐리우스는 그의 정신적 스승이었던 에픽테토스(Epiktetos), 폭군 네로의 스승이었던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와 더불어 후기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철학자입니다. 금욕과 절제를 실천한 황제였으며, 반평생 전쟁터에서 틈틈이 써낸 그의 자성록 12편은 후기 스토아 철학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아우렐리우스는 철학적 이상론보다는 개인 중심의 사상 체계에 주목했습니다. 개인의 철학은 ‘그 사람의 말이 아니라 행동’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의 자성론은 이러한 실천 사상적 측면에서 근대 실존주의와 비성경적 프로테스탄트 교파의 사상 체계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불확실성의 현대사회에 개인주의 또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사상적으로는 포스트모더니즘, 다원주의, 상대주의로, 심지어 전반적인 뉴에이지 문화 흐름과도 연결되는 측면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는 실천적 방법론만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지난 역사의 면면을 살펴보면 개별적이든 구조적이든 모든 문제는 개인으로부터 발생하여 집단화를 이루어 왔습니다. 오늘날 현대사회에 이르는 동안 이러한 구조는 고도로 지능화되어 사상적으로, 종교적으로 심지어 과학적 방법론까지도 연결되어 있다는데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과 진실’, ‘정의’와 ‘진리’를 규명해 나간다는 것 그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현대사회는 특히 그렇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모호한 ‘본질성’에 대한 이론이 다양한 ‘본질성’에 대한 이론을 생산해 내는 ‘단일하고도 획일된 사회의 거대한 가치 체계’가 자리 잡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제도나 주의, 주장은 시대 논리에 부합하는 것 같으나, 실상은 ‘상대적’으로 ‘사실’에 가까운 것, ‘진실’에 가까운 것에 지나치지 않습니다.  
▲ 孟子(왼쪽), 荀子(가운데), Marcus Aurelius(오른쪽)    

고대 중국의 사상가들의 경우를 보면 ‘유교의 사상체계’ 안에서 실제론에 주목했습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하고자 사상적 방법론을 궁구(窮究)했습니다. 공자(孔子)의 경우, 왕도정치 또는 도덕정치에 주목하는 가운데 사람의 ‘본성’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에서 그의 사상을 전개하였습니다. 공자가 죽고 100년 정도 뒤에 태어난 맹자(孟子)는 공자가 가진 사람의 ‘본성’에 대한 긍정적인 경향을 발전시켜 ‘성선설(性善說)’을 체계화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유물론적 경향을 가졌던 순자(荀子)는 맹자의 성선설에 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습니다. 이 두 사상가는 인간의 본성이 태어날 때 ‘악한지, 선한지’에 관하여 대립하는 입장이었으나 그들의 목적은 동일했습니다.     

이 두 사상가의 목적이 동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본질적인 ‘인간론’에 관하여 논한 것이 아니라, 인간상의 행위에 대한 ‘성론(性論)’을 밝힌 것입니다. 이유는 성론의 입장에 따라서 실제의 방법론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순자와 맹자는 서로 반대의 입장에 서 있었으나, 백성들로 하여금 수양을 통하여 도덕적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맹자와 순자 그리고 아우렐리우스, 이들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사상적 경향을 이루어 오는데 하나의 단초가 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다양성’이 획일화된 ‘현대사회의 사상 체계’ 안에서는 주관적인 수단이나 도구에 한정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사상적 한계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어떤 미모의 젊은 서양 여성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기 위해 단신으로 그 어떠한 안전장치도 마련하지 않은 채, 인도 대륙의 오지를 두루 횡단하였습니다. 오랜 여정이 경과하고 델리에 도착한 그녀는 말 그대로 온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나마, 감금되거나 죽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그녀는 여행 과정에서 벌거벗은 자신의 몸으로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고자 하는 어떠한 행위들을 시도하였습니다. 결코 성행위를 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선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신념과는 달리, 한사람 또는 두 사람 이상의 남성의 무리로부터 델리에 도착하기 까지 수많은 성행위를 경험했습니다. 이것은 성폭행이 성립될 수 없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성행위를 유발한 것은 바로 그녀였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경험한 사람들처럼 사람의 성품이 아무리 악하다고 할지라도 모든 사람이 도덕과 윤리에서 벗어난 행위를 일삼지 않습니다. 고결한 선한 성품을 가진 사람일지라도 특정한 상황이나 심지어 극한에 처할 경우에는 악한 행위를 합니다. 사람의 본바탕이 선한지 악한지는 사람의 행위에 있어서 기준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끊임없이 삶의 현장에서 확인합니다. 설령, 악한 행위를 혐오하여 자살을 택한 사람일지라도 본성을 규명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수많은 사상가들의 사상도 인간사의 현상을 통하여 인간으로서의 실체가 가진 품성 그 자체를 들어낸 다양한 면을 우리는 경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논리 구조에서 탈피하여야 합니다. 성경 말씀에 더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자기 중심의 이성적 판단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행위의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삼지 않습니다. 율법시대인 구약 시대에도 표면적으로 행위에 따라 율법을 적용한 것 같았으나, 실상은 본질에 따른 엄격한 율법의 적용이었습니다. 성경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상가들이 전한 철학적 논리와 교훈 이상을 요구합니다.     

이유는 매우 분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본질적인 상태의 인간이 어떠한지를 아는 것은 구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산상수훈의 일성(一聲)을 통하여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태복음 5장 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즉 전적으로 ‘부패’한 우리의 ‘본질적인 상태’를 깨달은 것은 자신이 ‘구원받아야할 존재임을 아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의인인 자 즉, 자신의 부패성을 거부하는 자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상태입니다. 진정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을 수밖에 없으며, 자신을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로 영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아셀루스(Asellus)의 무덤 석판-4세기 중반, Roma Pio Cristiano 박물관_베드로와 바울>    

성경 시편 14편 1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바울사도는 이 말씀을 통하여 로마서에서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3장 10~18절)라고 재선언하였습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알아야할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성경으로 빨리 돌아가십시오. 지체할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 말씀에 따라 실천하십시오. 그러면 권력과 맘몬(Mammon)이 자리 잡은 예배당 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무한한 긍휼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슴 깊이 품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범죄할 수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살인까지도 합니다. 다반사로 일어나는 이 세상을 보고 비판의 화살을 밖으로 돌리지 마십시오. 화살의 방향은 언제나 안으로 향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부패성을 더욱 확인하는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하심이 천상천하(天上天下) 이 우주 가운데 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크나큰 ‘축복’인지를 더욱 확인하며 감사할 것입니다. 이처럼 깨닫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 많아질수록 이 세상은 반드시 변화되어 갈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부패성을 깨달케 하소서! 부패한 자신을 깨닫는 것이 결코 자신을 혐오하거나,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옛사람을 지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하여 ‘새사람’을 입는 ‘출발’임을 알게 하소서!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불의와 부패가 타락한 우리의 본성에서 출발했음을 알게 하소서! 오직 주님과 주의 말씀만이 우리 자신과 온 세상을 치유하는 유일한 길임을 깨달케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나이다. 아멘. 
    
* 하승무 목사는 한국예수교장로회(OPCK) 기관 목사이자, 시인이다. 현재 한국장로회신학교 역사신학 교수로 봉사하고 있다.<kpts@kpts.or.kr>

기사입력 :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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