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풍수지리설의 사상적 근원②자손의 부귀영달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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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논설위원 2018-12-27

<한국 풍수지리설의 사상적 근원 연재순서>
①풍수는 땅의 생명을 연구하는 학문
②자손의 부귀영달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③중국 풍수와 불교가 혼합되어 비보풍수로 발전  


『효경』, 부모 무덤자리 택해서 편안히 모시는 것 ‘신종의 예[愼終之禮]’    

음택에서 교외에 무덤을 만들 때에 마땅한 방법이 없으면 점을 쳐서 자리를 정하는데 광중(壙中)은 ‘택(宅)’이라 하고 묘역은 ‘조(兆)’라 한다. 좋은 자리를 택해서 안장해야 하는데 『효경』에는 ‘신종의 예[愼終之禮]’라 하였다. 이는 부모의 무덤자리를 잘 골라서 편안히 모실 것을 가르침이다. 이것은 현재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발복을 통한 자손의 부귀영달을 바라는 마음이 아니다. 망자[死者]가 편안한 사후 세계를 맞을 것을 바램이요, 죽은 자에 대한 예의이다.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유가에서는 무덤은 곧 망자가 영원이 쉴 수 있는 주거 공간이었다. 따라서 무덤을 생전에 안락하게 거주하던 집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풍수의 기원설에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물[水]’과 ‘바람[風]’을 불가분의 관계로 보았다. 더욱 풍수사상이 싹튼 고대 중국에 있어서는 늘 그랬다. 서북쪽 몽고 사막에 불어오는 한랭한 바람은 생물을 위협하고 사람의 생존에도 매우 치명적이었으며, 황하나 양자강의 범람 또한 생존상의 절실한 문제였다. 그래서 서북풍을 막고 홍수를 다스리며 알맞은 물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으므로, 거주할 택지를 선택하고 유택(幽宅)인 음택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바람과 물로 인한 재앙을 면할 수 있는 터를 찾는 복지(卜地) 사상이 생긴 것이다. 복지는 지세나 지상(地相)을 관찰하는 상지법(相地法)을 발달시켰으며, 이것을 믿고 신앙화해서 오늘날의 풍수사상이 형성되었다. 고대로부터 중국에서는 요(堯), 순(舜)을 비롯한 많은 임금들이 치수(治水)에 힘써왔으며 치수에 성공한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물이 사람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실례이다. 이와는 별도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위하여, 자연 환경의 변화에 대한 법칙을 연구하고 이를 이용함으로써 인생의 행복 추구를 목표로 삼는 생활의 지혜로서 풍수지리학이 출발하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 하회마을을 비롯해 성읍마을, 남사마을, 개평마을, 왕곡마을 등은 마을이 배 모양으로 물에 떠 있는 형국의 행주형(行舟形) 입지이므로 마을에 우물 파는 것을 기피했다.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특징은 하나는 거주 공간과 이를 둘러싼 주변 환경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며, 주변 환경을 상징적으로 해석 한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풍수에 따라서 자신이 거주할 공간과 주변 경관에 대해서 공통의 의미를 부여하려 했다. 예를 들면 성읍마을, 하회마을, 남사마을, 개평마을, 왕곡마을 등은 행주형(行舟形) 입지이므로 마을에 우물 파는 것을 기피했다. 마을이 배 모양으로 물에 떠 있는 형국이라 구멍을 뚫으면 가라앉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행주형의 마을은 키, 돛, 닻, 노 등과 같은 배에 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갖추어야 하는데 청주, 무주, 평양, 안동 등이 이에 속한다고 한다. 행주형은 마을을 장차 출발하려는 묶여있는 배와 같다고 인식해 재화와 사람이 풍부하게 모인다고 생각했다. 행주형 지세에서는 돌탑과 같은 무거운 것을 세우지 않았다. 그 무게에 배가 가라앉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 풍수의 장점은 이와 같은 해석을 절대적인 규범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다 유연한 생각으로 환경을 개선하려고 하였다.    

중국보다도 ‘비보 풍수’의 개념을 발전시킨 한국    

우리 선조들은 최소한의 자연을 변화시켜 최상의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발상의 전환을 하였다. 따라서 중국보다도 ‘비보 풍수’의 개념이 발전하였다. 비보란 이상적인 공간을 찾을 수 없을 때 부족한 부분을 인공적으로 보완하는 것이다. 이는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전통 마을에서도 비보를 통해 풍수상의 취약점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게 된다. 한 예로 안산(案山)이 취약한 경우 동수를 마을 전면이나 겨울철 바람이 강한 방향에 조성함으로써 약점도 보완하고 방풍 효과도 얻게 된다. 이것은 풍수지리의 개념을 차용해 자연을 순화함으로써 거주자들의 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선조들이 주어진 환경을 선용(善用)하기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전통 마을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풍수지리의 덕이라기보다도 슬기와 사고의 전환으로 부족한 부분을 바꾸려 애썼던 선조들의 노력 때문인 것이다. 전통 마을에 찾아가면 풍수지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라도 산과 물과 공기가 좋고 물산이 풍부한 살기 좋은 터에 자리를 잡았음을 바로 느끼게 된다. 좋은 자리에서는 중요 건물들을 남향으로 건설하기 마련이다. 사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도 지을 수 있지만 남향집이 주된 까닭은 북향집과 서향집의 문제점 때문이다. 북향집은 겨울이 길고 매서운 우리나라에서 태양열의 혜택을 충분히 받지 못하며 서향집도 이에 만만치 않다. 그런데도 전통 마을에 들어서면 생각보다 남향집이 많지 않다.    

한국에서 풍수사상의 기원에 관한 논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한반도 자생설이고 다른 하나는 고대 중국으로부터의 유입설이다.     

이 중에서 자체 발생설이 유력하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단군신화에 기록된 대로 “‘삼위태백’을 내려다 본 후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에 신시(神市)를 정했다.”는 풍수적 사상과 내용이 있다. 둘째, 고구려의 유리왕과 백제 시조 온조왕이 도읍지를 정할 때 먼저 산세를 살피고 난후에 터를 잡았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땅의 질서에 따라 인간은 적응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풍수지리 기원설들과는 무관하게 한반도에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한 바로 그때부터 환경에 적용하기 위해 풍수 사상이 자생적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삼국유사』나 『단군신화』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에는 자연 환경에 맞는 풍수사상이 도입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야생 짐승도 잠자리와 번식처를 골랐듯이 고대인들 또한 생활공간을 골라잡았을 것이다. 그 예를 고대인들이 살았던 생활 흔적인 고인돌과 토굴 등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고인돌은 고대인의 무덤으로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세계 문화유산이다. 강화도의 지석묘, 나주지방의 지석묘, 한국최대 거석 지석묘인 관산리 고인돌, 고창의 고인돌, 단군묘, 『삼국사기』의 평양성, 가야국의 왕릉, 패총 등 고대인들의 무덤들은 자생적 풍수사상 이론과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고인돌은 3000에서 5000년 전에 조성된 돌무덤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분포한다. 고인돌의 위치는 대개 산의 봉우리에서 이어지는 용맥(龍脈)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미 고인돌 시대에도 산의 주봉에 연결된 용맥을 길지로 보았다는 증거라 하겠다. 또한 독특한 배산임수의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단군신화’ 이전에 이미 자연 환경을 활용한 원초적 형태의 고유한 풍수사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고유의 자생적 풍수와 관련해서는 신라 4대 왕인 탈해왕(생년 미상, 재위 57년에서 80년)이 집터를 잘 골라 왕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의 고분 벽화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또 평양 정릉사, 익산 미륵사, 경주 황룡사 등 현존하는 삼국시대의 삼대 사찰과 그 밖에 많은 사찰들의 지형지세를 보면, 삼국 초기부터 국민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고 국가를 잘 경영하는데 풍수가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한국의 자생 풍수가 중국 풍수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것은 통일 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당시 선가 계열의 승려들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풍수설을 배워온 흔적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반 대중에 대한 포교 수단으로 풍수설을 활용했다. 특히 도선 국사는 당나라에서 가져온 풍수사상을 우리의 자생 풍수에 접목시켜 풍수지리를 집대성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 사상뿐만 아니라 풍수설과 도참사상 등이 사회를 이끌어간 주도적 사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고려 태조의 ‘훈요 10조’에는 풍수적 사고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풍수 관련 조항은 2훈과 5훈과 8훈이다. 고려 시대에는 주로 승려들이 풍수설을 담당했다. 이들 대부분은 도선 국사의 후계자를 자처하면서 그의 저술로 알려진 『비기(秘記)』를 토대로 자신의 풍수설을 주장했다. 묘청은 서경 천도설을 내세웠고, 공민왕 때 보우스님은 한양 천도설을 주장했다. 신돈은 충주 천도설을, 훨씬 이후에 나옹선사와 제자 무학대사는 조선의 개국에 기여했다.    

조선 시대에는 불가뿐만 아니라 유가에서도 많은 풍수 명사를 배출했다. 이성계는 정권 찬탈에 성공하자 민심 수습과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당위성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풍수지리설을 이용했다. 유학을 정치 이념으로 하던 조선조에서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았다. 초기부터 서운관(書雲觀)이라는 풍수지리 담당 관청을 설치했다. 그리고 풍수관료를 선발하였다. 서운관에서는 천문, 재상, 역일, 추택 등을 담당했다. 운관은 나중에 관상감으로 바뀌어 천문, 역수, 측후 등을 관장했다. 또한 음양과를 설치해서 과거시험으로 지관을 뽑았고, 사대부가에서는 풍수지리학을 모르면 행세할 수가 없었다. 선비와 승려들 사이에서도 많은 기인이나 도사들이 배출되었다. 민간에서는 풍수설이 신앙화 하였으며 음택이 널리 유행했다.    

그러나 풍수지리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지나쳐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명당을 찾아 부모를 묻어 부귀영달하려는 이기적인 방법이 팽배해졌기 때문에 묘지를 둘러싼 폐단이 심해졌다. 이에 정약용, 박제가 등의 실학자들은 그들의 저서를 통해 풍수의 폐단을 지적하기에 이르렀다. 근대 개화기에 들어서면서 계몽파들은 풍수지리설을 크게 비난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미신으로까지 규정되었다. 일제는 풍수지리가 미신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그들의 식민지 통치에 철저하게 풍수를 이용했다. 총독부가 중심이 되어 전국의 풍수 자료를 수집하였는데,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저술된 풍수 서적이 촌산지순(村山智順)의 『조선의 풍수』이다. 일제는 조선의 지맥을 자르고 정기가 맺힌 명산에 쇠말뚝을 박는 등의 만행을 저질러 조선 사람들로 하여금 패배의식에 젖도록 하였다. 현대에 와서는 환경 문제가 대두되면서 대규모 도시 계획, 경관 계획, 생태 조경, 환경 보존 등에 풍수지리가 활발하게 연구되고, 응용 및 활용되고 있다.
(삼국유사문화원장)

기사입력 : 2018-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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