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치료 최고의 처방은 佛法…봉사·나눔으로 불교적 삶 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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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홍 대기자 2019-04-13

불교상담개발원 초대원장 이근후 신경정신과 전문의 정신치료는 를 찾는 과정” 

 

인간의 고통, ()’에는 육체의 병과 정신의 병이 있다. 흔히 이라고 하면 육체의 병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의 병 또한 인류에게는 힘겨운 고통이 된지 오래이다. 문명의 발달로 인해 다양해지는 육체적 질환과 더불어 정신적 질환 역시 그 형태와 증상이 다양해지고 어려워지고 있다. 정신적 질환은 개개인의 증상이 그대로 다양성의 표본으로 이어진다. 개개인의 질환이 하나의 병명(病名)이고 사례인 것이다. 이 때문에 처방 역시 정해진 처방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의 정신적 질환, 즉 마음의 병은 무엇으로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박사(85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이미 불교에 답이 있었다고 역설한다. 부처님의 말씀이 상담사례라고 말하는 이 박사는 부처님의 말씀으로 처방전을 써왔다. 그는 평생 대중의 아픈 마음을 불법(佛法)으로 고치며 살아온 정신과 전문의이다.  

 

정신적 질환은 마음이 겪는 갈등정신치료, ‘를 찾는 과정

프로이드 정신분석과 불교는 일맥상통서양의 정신분석 이미 불교에 있어

 

이 뭣고?’=‘Who am I?’

 

이근후 박사는 불심(佛心)이 깊은 어머니 곁에서 성장했다. 하지만 그에게 불교는 자신을 위한 신앙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가 불교를 받아들이고 불교에 다가간 것은 인간적인 삶을 위한 것으로, 그에게 불교는 추구해야 할 학문이고 사상이었다.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을 위한 평생의 공부였다. 그에 대해 이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과 치료는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루는 것이죠.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공부죠. 서양에서 프로이드(Sigmund Freud,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의 시대가 열리면서 무의식의 세계가 조명되기 시작하고 정신분석이라는 학문적 시대가 열렸죠. 그런데 그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라는 이론은 이미 불교 경전에서 말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결국 불교에 다 있다는 것이죠. 일례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는 이미 유식’(唯識: 일체의 제법諸法은 심식心識의 표현으로, 실재하는 것은 오직 식뿐이라는 뜻)이 훨씬 더 깊고 넓게 이야기하고 있죠.”

 

이 박사가 불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 아니 불교공부를 시작한 것은 정신과 전문의(1968)로서 많은 환자를 만나면서부터다. 그는 같은 정신과 전문의들과 모여 공부하던 중에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불교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니 불교에 이미 있었던 설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당시 이 박사가 속한 스터디그룹은 탄허 스님, 지관 스님 등을 초청해 많은 토론과 공부를 했다. 의사들이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을 이야기하면 스님은 그 사례와 답을 경전에서 찾아주었다.

 

정신적인 질환은 마음이 겪는 갈등이죠. 그 갈등이 깊어져 삶 전체를 갈등이 지배하게 될 때 인간의 삶은 힘겨워지고 결국 이 되는 것이죠. 갈등이라는 것은 를 잃어버린 결과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Who am I?’인 것이죠. 정신 치료에는 크게 두 가지 치료법이 있는데, 하나는 지지(support)치료이고, 또 하나는 통찰치료입니다. 지지치료는 무의식의 세계를 다루지 않으면서 보이는 현상만으로 치료하는 것이고, 통찰치료는 근원을 찾아가게 함으로써 자기습관을 고치고 생각을 고쳐서 깨달음으로 가게 하는 치료법입니다. 결국 정신적 어려움을 치료하는 것은 환자로 하여금 를 찾게 해주는 것이고, 환자는 를 찾아가는 과정인 것이죠.”

 

이 박사의 환자 중에 자신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환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엔 그렇지 않았다. 오랜 기간 입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사와 환자의 생각이 너무도 달랐던 것이다. 그 환자는 회진 때마다 이 박사에게 물었다. “저는 언제 퇴원할 수 있나요?” 이 박사는 그럴 때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환자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어느 날도 그 환자는 이 박사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다. 이 박사는 더 이상 환자를 설득할 만한 구실을 찾지 못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박사는 아무런 말을 못한 채 한 동안 천장만 바라보다 병실을 나왔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그 환자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번쩍 들더랍니다. 제가 자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했답니다. 더 이상 자신을 들여다 봐줄 사람이 없어졌다고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랍니다. 정신을 차린 것이죠. 정신과 치료는 바로 그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깨닫는 일이죠. 그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나를 찾아가는 것인 것이죠.”

 

▲ 정신과 치료는 사람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 다른 말로 하면 마음공부하는 것이라 말하는 이근후 박사  

 

나를 찾아가는 과정. 그야말로 어디서 많이 들었던, 늘 듣고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바로 불교이다. 이 박사는 ‘Who am I?’이 뭣고?’와 같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찾고 또 찾아가는 과정, 라는 화두(話頭)를 놓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깨달음의 차이는 있지만 그 과정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박사는 환자를 치료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부처님의 대기설법이다.

 

부처님의 설법(경전)이 대단한 것은 대중의 근기(根基)를 생각해 설법했다는 것이죠. 그 대목이 정신과 치료를 하는 제게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매우 힘겨운 사람들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죠. 결국 정신적으로 연약한, 불안한, 한 마디로 근기가 약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죠. 정신과 치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환자 각자가 하나의 병명이고 사례이기 때문에 각자에게 맡는 처방전을 써야 하는 것이죠.” 

 

봉사로 이어지는 佛法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박사의 불교는 자신을 닦는 수행의 방편이나 복을 쌓기 위한 기복(祈福)의 신앙이 아니다. 하지만 불교적 삶이라는 그의 삶의 형태는 결과론적으로 불교를 귀의처로 삼은 여느 선남자와 다르지 않다. 마음속에 받아들인 불교가 어떤 형태의 것이든 부처님의 말씀으로 보고 듣고 생각하고 걷는 자의 삶이라면 그 빛깔은 분명 같은 빛깔인 것이다. 그의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부처님이 가르쳐준 대로 길을 가고 있었다.

 

네팔 가자! 가서 멀리 서있는 산 한번 쳐다보고 돌아오면 뭐라도 달라진다. 우리도 달라지고 그들도 달라지고, 그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나?”

 

이 박사는 1989년부터 이화여대 네팔의료봉사단을 조직해서 해외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대학 단위의 해외 의료봉사는 국내에서 처음이었다. 이미 3년 전부터 개인적으로 네팔지역 의료봉사를 해오고 있었던 이 박사였다. 그 당시에는 시대적인 상황으로 인해 학생들의 농활(농촌활동)’이 여의치 않았다. 학생들은 가고 싶고 학교 측은 마음 놓고 보내줄 수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 박사는 그 고민을 해외봉사로 돌렸다. 하지만 이 박사의 해외 의료봉사가 단순히 농활의 대체 차원만은 아니었다. 등산을 좋아했던 이 박사가 오래 전부터 네팔을 오가며 쌓은 인연과 느낀 것들이 그를 다시 더 큰 인연으로 이끌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박사의 봉사에 대한 관심은 1982년 네팔에서 시작됐다. 그는 1982년 한국산악회가 조직한 마칼루학술원정대 대원으로 참여했다가 쿰중에서 에베레스트를 최초로 오른 힐러리경()을 만났다. 힐러리경은 사비를 털어 오지의 주민을 위한 학교를 짓고, 네팔 산림의 황폐화를 막는 자연보호운동에도 앞장서고 있었다. 이 박사는 그런 힐러리경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다.

 

힐러리경의 삶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새롭게 느꼈어요. 함께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됐죠. 그리고 부처님 법에서 생각해보니 다른 사람의 삶을 결코 다른 삶이라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눈에 보이는 오늘만이 나의 삶이 아니라고 생각하니 그들의 삶 속에 나의 삶도 함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조금은 힘겹게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내가 거쳐 온 삶이었을 수도 있고, 또 언젠가 내가 거쳐야 할 삶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 박사는 다소 힘겹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네팔 사람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것들을 보게 됐다. 물질적으로 다른 지역의 삶과 비교가 되는 삶을 살고 있는 그들이지만 행복의 지수가 물질과 정비례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의료였다. 이 박사는 1989년부터 네팔 의료봉사를 시작해 20년 넘게 매년 네팔의 오지 마을과 수도 카트만두를 중심으로 의료봉사를 해왔다. 그리고 그들의 삶에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물질적으로는 네팔 사람들보다 우리가 좀 더 풍요롭게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행복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료봉사를 하는 동안 알게 됐어요. 우리가 그들보다 행복하다고 단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죠. 우리는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풍족한 물질로 인해 벌어지는 정신적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죠. 제가 의료봉사를 하면서 그들에게 느낀 것은 그들이 우리보다 불행하다고 할 수 없고, 우리가 그들보다 꼭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는 듯한 오늘의 삶을 생각하면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 박사의 이타적인 생각과 삶은 국내에서도 이어진다. 그는 40년 넘게 자신이 이사로 있는 광명보육원을 돕고 있다. 인연은 그의 모친으로부터 시작됐다. 불심이 깊었던 이 박사의 모친은 6.25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온 광명보육원 아이들을 돌봤다. 이 박사가 네팔 사람들을 위해 의료 봉사를 하는 것과 같은 인연이다.

 

이 박사는 군의관으로 재직하던 1967, 근무지인 서울 창동 부근에 광명보육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보육원을 도왔다. 그는 1995년 보육원에 3층짜리 건물을 기증했다. 그리고 무하(無何)문화사랑방을 열어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무하문화사랑방에서는 시인과 화가 등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아이들에게 예술 체험 교육을 하고 있다.

 

예전 보육원에는 그야말로 부모가 없어서 오는 아이들이 대부분이었죠. 하지만 요즘 보육원에는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오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들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봤어요. 부모가 없고 갈 곳이 없어 왔던 아이들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을 보았다면,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온 아이들의 마음속에서는 적개심을 보았어요. 그 아이들의 이 뭣고는 바로 그 적개심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적개심을 해결하고 스스로 ‘Who am I?’를 마음에 들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정신과 전문의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죠.”

 

이 박사는 그 아이들의 이 뭣고를 풀어주기 위해서는 그들이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마음 자리를 볼 수 있게 해주고, 그 자리로 돌아가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아이들의 감성에 다가가기 위해 예술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이 박사는 2004년부터 네팔 작가들을 초청해 전시회, 공연 등을 열었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시()를 올리는 등 청소년 멘토링에 힘을 쏟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매우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시각각 쏟아지는 새로운 정보와 새로운 문화, 새로운 이기(利器)들로 인해 문명은 빛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진화의 이면에는 어두운 결과들도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제일 걱정해야 하는 것이 점점 사라져가는 인간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성의 회복이야말로 빛의 속도로 진화하는 문명의 속도만큼 빛의 속도로 회복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시작은 바로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의 실종이라는 문제를 들여다볼 때 첫 번째로 회복해야 하는 것이 가족의 형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의 가족이라는 형태는 예전의 가족과 많아 다릅니다. 아니 점점 없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달라진 가족의 모습이 현 사회의 모습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성이 시작되고 키워지고 가꿔질 수 있는 곳은 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박사는 1995년부터 사회봉사단체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공동 대표)해 광명보육원 등을 돕고 있다.

▲ 인간성이 시작되고 키워지고 가꿔질 수 있는 곳은 ‘가족’이라고 역설하는 이근후 박사

 

불교상담개발원 탄생의 초석

 

2000422일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은 불교상담개발원을 설립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담이라는 방편으로 널리 펼쳐 모든 존재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마음을 나누어 세상을 밝히고,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실천하기 위해 설립됐다. 불교상담개발원은 1990년 개통된 사단법인 자비의 전화를 모태로 설립된 불교계 전문상담기관으로, 지금까지 어려운 이웃들의 심리적 아픔을 불교심리상담을 통해 치유하는 보살행을 실천하고 있다.

 

주요 사업으로는 불교상담심리사 양성 및 자격관리를 위해 조계종 포교원 인가 2년제 불교상담대학과 대학원 운영, 불교상담심리사 2급 사이버 과정, 월례특강, 상담원 재교육 및 전문소양교육 등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산사에서 만나는 불교와 상담워크숍’, 불교상담 프로그램 개발, 불교상담 교재 및 자료집 발간, 불교상담 학술상 제정 등 불교상담에 필요한 연구개발 진행과 사찰 상담실 지원 및 자문, 심성수련 프로그램 운영 및 불교상담 교육 강사 파견 등을 통한 현장 지원을 하고 있다. 불교자살예방센터와 서울시 사회복지협의회 자원봉사인증센터, ()자비의 전화를 운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교상담개발원의 연혁과 다양한 활동을 살펴보면 그 불사가 가볍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부처님의 경전은 상담사례라고 할 수 있다. 중생의 아픔을 덜어주기 위한 위대한 노력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불교상담개발원의 존재와 불사는 그야말로 부처님을 대신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불사의 초석이 초대 원장 이근후 박사이다. 특히 산사에서 만나는 불교와 상담워크숍은 이 박사가 시작한 프로그램으로, 불교상담의 질적 향상에 이바지한 바가 크다. 이 박사는 상담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불교 상담의 질적 향상을 위해 노력한 주역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이 본래 불성을 찾아가는 것이라는 것과 부처님의 유언인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을 생각할 때, 불법(佛法)을 통한 상담은 불사 중의 불사이다. 불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 박사는 1982년부터 전국의 석불을 찾아다니고 있다. 얼굴은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곳이다.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궁금했던 이 박사는 그 궁금함을 석불에서 찾고 있다. 이 박사는 특별히 개인적인 수행의 방편을 설정하고 있지 않다. 특별히 내세우는 신행생활도 없다. 하지만 그에게서는 늘 부처님의 그림자가 보인다. 늘 불법(佛法)으로 대중의 마음을 들여다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늘 그 마음속에 들어있는 아픔을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정신과 전문의 이근후의 처방전은 부처님의 글씨로 채워진다. 그의 처방전은 설법이다.

 

이근후 박사는 누구인가

 

193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이근후 박사는 1961년 경북대 의대를 졸업하고 1968년 전문의가 됐다. 연세대와 이화여대에서 신경정신과 교수이자 전문의로 재직하면서 50여년간 환자를 치료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1989년부터는 이화여대 의료봉사단 단장을 맡아 네팔 지역 의료봉사를 해왔다. 1995년부터는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해 청소년 성상담, 부모 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 준비 교육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2000년 불교상담개발원 초대 원장을 지내며 한국 불교상담의 향상을 이끌었다.

 

국내 치료 환경에 처음으로 개방병동을 시행하고 치료법의 하나로 사이코드라마를 도입했으며, 한국정신치료학회를 설립하는 등 우리나라 정신의학 발전에 공헌했다. 정년퇴임 후에는 부인 이동원 박사와 함께 가족아카데미아를 설립해 건강한 가정과 행복한 노년을 위해 연구하고 교육에 나서고 있다.

 

정신치료 어떻게 하는 것인가,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등의 저서가 있다.  

 

평생 가족문화운동 한길 이근후·이동원 박사 부부가족아카데미아 통해 공동체 봉사활동22녀와함께 살며 대가족 실험

 

결혼을 기점으로 평생 서로 격려하며 손잡고 한길을 달려온 부부가 있다. ‘가족에 대한 고민과 실험에서 비롯된 이들의 팀워크는 점점 가지를 치며 공동체를 향해 뻗어나갔다. 정년퇴임 후 이들 부부의 실험은 오히려 한층 탄력을 받으며 활발해지고 있다. 1995년 사단법인 가족아카데미아를 공동 창립하고 운영 중인 신경정신과 전문의 이근후 박사, 사회학자 이동원 이화여대 명예교수 부부의 얘기이다. 이들 부부는 가족아카데미아를 주축으로 부모·예비 노인·공부방 교사교육 등 다양한 사회교육과 함께 광명보육원, 네팔 등을 지원하는 나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정신과 전문의와 사회심리학자로 동행

 

이들 부부에 대해 지인들이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일찍이 집 대문에 이동원·이근후라는, 아내의 이름을 먼저 쓴 부부 공동 문패이들이 동지로 굳게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신혼초에 불어닥친 경제적 어려움 덕(?)이었다. 이근후 박사의 여동생과 중학교 동창인 인연으로 결혼까지 하게 된 이동원 박사는 막연히 결혼 전부터 남편이 병원을 차리면 자신의 전공을 살려 같이 일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대학원에서 심리학 공부까지 했다고 한다.

 

부부는 자의 반 타의 반 한길을 걸었다연세대에 재직했던 이근후 박사가 아내가 근무하는 이화여대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아내는 남편의 이직을 내심 불편해했지만, 그 덕에 1970년대 말 윤후정·정의숙 교수 등과 함께 여성학 도입 과정을 2년간 함께 준비할 수 있었다. 이것이 이들 부부가 구체적으로 여성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 경북 대구 출신인 이근후 박사는 적십자운동에 적극적이었던 신여성 어머니 덕분에, 이동원 박사는 안동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절대적으로 우대했던 타고난 여성학자였던 친할머니 덕분에 여성학의 씨앗을 이미 내재하고 있었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부부의 관심 축은 자연스레 가족으로 옮겨갔다

▲ 이근후·이동원 박사 부부는 장성한 2남2녀와 손주들과 함께 북한산 밑 구기동에 집을 짓고 새로운 대가족을 실험하고 있다. 이 공동생활에서 가족들은 가족헌장을 만들고, 가족 반장 선출 등 ‘규정’을 준수하고 있다.  


고령화 사회, 20대부터 예비 노인 교육으로 준비를

 

여러 임상 케이스를 보면서 새로운 가족관계는 인터디펜던트’(interdependent 상호 의존적)해야 건강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의 가족관계는 너무 의존적(dependent)이고, 서구의 가족관계는 또 너무 독립적(independent)인데, 그 중간이 필요한 것이다. 즉 가족 구성원 각자가 스스로의 자아를 지키면서도 어느 정도 공유를 하는 그런 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이근후 박사)   

이들 부부는 장성한 22녀와 손주들과 함께 북한산 밑자락 구기동에 집을 짓고 새로운 대가족으로 살고 있다. 처음엔 부모의 노후 돌봄과 육아문제에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극히 현실적인 생각에서 자식들이 먼저 제안한 공동생활은 부부가 토지를 제공하고 자녀들 각자가 대출 등을 통해 재원을 마련해 성사됐다. 어언 20여 년 지속되고 있는 대가족 관계에서 이근후 박사가 처음부터 강조해마지 않은 것은 상호 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 그래서 각 가구의 평수와 내부 구조, 출입문 모두 제각각 형편에 맞게 다 다르게 만들었다. 너무 가까이 끌어안으면 고슴도치처럼 부지불식간에 서로 찌르게 될까봐서다. 이 공동생활에선 부모라도 자식의 허락을 구하고서야 자식들의 집을 방문하고, 조를 짜서 순환제로 식사 당번을 맡고, 6개월 단위로 가족 반장을 선출해 공동 통장을 관리하는 등의 규정이 준수된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 앉아 토론 끝에 가족헌장도 만들었다.

 

이런 개인적 체험 때문인지 이들 부부는 유난히 예비 노인교육을 강조한다. 20대도 따지고 보면 다 예비 노인, 젊어서부터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핵심은 자기 정체성을 찾고 그에 따른 역할을 하게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날 때 칭찬을 많이 들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어하며 자신감을 가지듯 노인들도 주눅 들지 않고 능력을 갖춘 전문인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부부의 모든 활동의 단초는 개인적·사회적 트라우마에 대한 치유이다. 개인·가족·사회의 건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정체성이고, 구체적으론 내가 행복해야 남도 행복하게 할 수 있다는 전제이다. 그들이 주력해온 공부방 교사를 대상으로 한 교육이나 경찰 대상 심리교육에서도 이는 어김없이 입증됐다. 피폐한 근무 환경에서 어떻게 다양한 심리치료 프로그램으로 자기 돌봄을 실현할 수 있는지가 포인트다. 한국인들은 개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적 트라우마도 커 보통 상태에선 원활히 돌아갈 것도 스트레스가 고조된 상태에선 갈등을 야기한다. 사회병폐 현상이 된다는 것. 이근후 박사는 한국 사회는 분노의 사회라고 규정한다. 예전 같으면 산에 올라가 소리 한번 빽 지르면 분노가 풀렸는데, 지금의 소셜미디어 네트워크 시대엔 한 사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즉시 전이돼 거대한 불씨로 변해간다는 것이다.

 

고속경쟁사회가 트라우마 부채질 차라리 스티브 잡스가 없었더라면

 

이런 사회병리 현상은 전세계 공통인 글로벌 이슈다. 산업화와 자본주의를 선택하는 순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역설적으로 스티브 잡스 같은 IT혁명의 리더는 인류의 행복을 위해 오히려 나오지 않았으면 한다. 새로운 모델에 사람들이 적응할 수 있는 유예기간을 허용하지 않고 바로바로 신모델을 개발하니까. 풍요 속 빈곤이라고나 할까, 성취감을 맛볼 새도 없이 다른 곳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경쟁에 뒤처진다.”(이근후 박사)

 

이들 부부는 의대 시절 대학생 최초로 경북학생산악연맹 창립에 참여하는 등 산과 밀접한 인연을 맺어온 이근후 박사가 1982년 학술원정대원으로 히말라야 마칼루 원정에 참여, 반년간 네팔 구석구석을 누빈 것을 계기로 지금까지 네팔 사람들과 다양한 인연을 맺어 지원해오고 있다. 첫 네팔 방문에서 이근후 박사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산에 오른 에드먼드 힐러리경을 현지에서 만나 학교와 병원을 짓고 자연보호운동을 펼치는 그의 봉사에 큰 감명을 받았다. 이후 최소 1년에 한 번은 네팔을 방문하면서 의료봉사 활동을 펼치고 있는데, 정년퇴임 후엔 지원이 적어도, 의사가 없어도 약 먹는 요령만 가르쳐주면 치료할 수 있는 간질 환자에 집중하고 있다. 한편으론 한국에 유학 온 네팔 학생들을 집에 데려와 숙식을 제공해주며 지원하는 한편, 그들이 의사가 돼 고국에 돌아가면 자연스레 그의 의료봉사 활동에 동참케 했다.

 

이근후 박사는 네팔인들을 만날 때마다 한국에 온 것이 돈벌이 목적이 돼선 안 된다. 한국에서 얻은 것을 고국에 돌아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고 강조하곤 한다. 그 덕분인지 그의 강연을 듣고 네팔로 돌아간 사람들 중에 학교를 세우고 교장이 된 사람이 여러 명 있다. 그는 2000년대초 음식 값 문제로 주인과 옥신각신하다가 경찰서에 연행된 후 한국말이 서툴러 6년간 정신병원에 감금됐던 네팔 여성 찬드라 구롱씨를 구출해내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그가 네팔에 갈 때면 어김없이 찬드라가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한다고 한다.

 

찬드라는 네팔에서 여성 문맹 퇴치를 위한 교육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한국에서의 경험을 들어 나같이 글을 모르면 억울한 일을 당한다고 강연한다는데, 호응이 크다고 한다. 그렇게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 그토록 몸부림을 쳤는데, 진작 누구 한 사람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토록 오랫동안 억류되지 않았을 텐데. 찬드라에 대한 한국인의 사과는 그를 지원했던 풀꽃세상을위한모임과 나 정도다. 한국인의 무례함에 대해 제때에 사과했어야 했는데.”(이근후 박사)

 

네팔·광명보육원 나눔 봉사활동선한 동기 작은 조직이 사회변혁의 힘

 

이들 부부는 작은 변화에서 행복함을 만끽하곤 한다. 대표적인 것이 이근후 박사가 1960년대 말 군의관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광명보육원 아이들이다. 이 보육원에 환자를 진료할 때 따지지 말라는 의미의 이 박사의 호 무하’(無何)를 딴 무하문화사랑방을 열고 아이들에게 자존감 회복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시인과 화가 등 자신의 인적 네트워크를 적극 활용해 아이들에게 예술 체험 교육을 시킨다. 아이들이 각종 백일장에 나가 상을 휩쓸 정도로 성과가 좋다고 한다. 아이들의 멘토 중엔 그와 10여 년 지기인 고() 박완서 작가도 있는데, “여기 와서 아이들을 보면 오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절로 하곤 한다매년 백일장 때마다 아이들 시상을 위해 몸소 오셨다고 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기사입력 : 2019-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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