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은 깨닫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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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홍 대기자 2019-08-29

 


끊어진 수행과 실행 없는 깨달음은 무너져 내릴 뿐 아니라 결국 썩고 만다

 

영화 (·Zen, 2009)’은 일본 선종의 주요 인물 도겐(道元, 1200~1253) 선사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오타니 테츠오(大谷哲夫) 스님의 원작소설 에이헤이(永平)의 바람, 도겐의 생애를 타카하시 반메이(高橋伴明) 감독이 영상으로 옮겼다. 에이헤이는 도겐 선사의 법호이다. 소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답게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들이 온전히 도겐 선사(禪師)의 일화를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다. 창작도 있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화를 각색한 내용도 있으며, 일대기 중 선후가 뒤바뀐 부분도 있다. 하지만 영화는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의 정신과 수행의 본분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수행과 선의 본질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도겐 선사는 13세기 일본에 홀연히 나타나 불교의 개혁과 수행의 본을 보인 선승이다. 평생 좌선을 멈추지 않아 수좌들이 그 뒤를 따랐고, 불법(佛法)의 원리를 자세히 설명한 정법안장(正法眼藏)을 지어 수행의 본래 면모를 전했다. 일본 선종의 주류가 된 조동종(曹洞宗)을 개창하여, 타락의 길을 걷던 당시 불교에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강조한 새로운 모습을 제시했다. 그야말로 일본 불교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승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죽음을 앞둔 그의 모친과 8살 어린 몬쥬(文殊) 사이의 심상찮은 대화로 시작한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에게 묻는다.

 

아미타 부처님께 귀의하면 죽어서 정토(淨土)에 이른다고 하는데, 정말로 정토에 갈 수 있을까?”

 

어린 아들이 당돌하게 답한다.

 

죽어 정토에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의 어머니가 말을 이었다.

 

내게는 너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 여기야말로 정토이고 여기 말고 어떤 곳도 정토라 할 수가 없구나.”

 

어머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야말로 정토가 아니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대화는 도겐 선사의 생애를 관통하는 화두이다. 그의 어머니는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는 길을 꼭 찾아주길 바란다는 유언을 남겼다. 도겐 선사의 부친 또한 앞서 여러 해 전 이미 세상을 떠난 터였다. 부모 모두 불심이 깊어 아들의 이름을 문수보살의 약칭인 몬쥬로 지었던 인연 따라 도겐은 13살에 출가했다.

 

영화는 도겐 스님이 불법을 구하기 위해 중국 송나라로 들어가 스승을 찾아다닌 여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는 길에서 전좌(典座) 노스님을 만나게 되는데, 전좌란 대중을 위해 먹을거리를 구하는 선종의 소임자이다. 노스님에게 노년인데도 이런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다니는 일을 하십니까? 절에 앉아 공안 참구나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고 묻자 그대는 현명해 보이긴 하나, 아직도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수행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답을 듣는다. 얼마 후 다시 만난 전좌스님이 그에게 알려준 불법이란 “1, 2, 3, 4, 5.” “진리는 어디에도 감춘 바 없이 이미 일체에 드러나 있다고 전한다. 도겐 스님은 이 만남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그의 전좌교훈(典坐敎訓)에 기록해 두었다. 이를 통해 스님은 일상의 모든 일이 수행이며, 매사가 불사 아닌 바 없다는 깨우침을 얻는다.

 

영화 앞부분에 잠깐 비춰지고 있듯이 중국에서 도겐 선사의 구도행(求道行)은 그다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불교가 융성했으나 이는 겉모습일 뿐 수행하는 이들은 적고 주지 소임을 맡은 이들은 관리와 귀족을 대접하느라 바빴다. 그들은 절을 지키기 위해서다라고 변명하지만, 도겐은 그렇게 절은 지킬 수 있겠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

 

도겐이 떠나 온 그의 조국에서, 불교가 최고로 번성했던 당과 신라, 고려에서 그리고 물질과 풍요가 넘치는 오늘 이 땅에서도 그 질문은 유효하다. 곡절을 겪은 후에 도겐 스님은 그의 스승이 된 천동여정(天童 如淨, 1162~1228·남송 때의 승려) 대사를 만날 수 있었다. 여러 해 수행 끝에 새벽 참선 시간 여정 선사가 어느 수좌의 졸음을 경책하는 소리를 듣고 도겐 스님은 깨달음을 얻는다. 인가를 받고 일본으로 돌아가는 도겐 스님에게 여정 대사는 그대가 얻은 깨달음마저 다 잊으라. 깨달음은 무한하며 수행 또한 한이 없으니 서로 끊이지 않고 이어가라.”고 당부한다.

 

귀국 후 새로운 불교를 세우려는 도겐은 기존의 불교계와 승려들로부터 박해받고 죽음의 위협을 받은 후 결국 깊은 산중으로 쫓겨나고 만다. 하지만 평생 수행을 통해 보여준 그의 노력은 조동종이 일본 선종의 대표가 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주된 내용인데, 덧붙여 우리가 더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도겐 선사는 훌륭한 스승이고 그가 일으킨 조동종의 선풍(禪風)은 혁신적이었다. 하지만 끊어진 수행과 실행 없는 깨달음은 무너져 내릴 뿐 아니라 결국 썩고 만다.

 

깨어 있지 않으면 집착하여 안락에 주저앉고 소멸의 길을 걷는 일은 만법의 진실이다. 세력이 커진 조동종은 개창자의 뜻과 달리 분열되었고 근대에 와서는 타락의 극치를 보였다. 천황(天皇) 중심의 국가주의 전체주의 세력, 군국주의와 결탁하고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승전을 기원하며 종군했다. 명성황후 시해에도 조동종 승려들이 개입한 일은 역사의 처참한 상처이다. 도겐 선사가 절은 지킬 수 있겠으나, 불법은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물었던 뜻은 세월이 흘러 자신의 발밑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승려들이 전체주의의 광기에 편승해 폭력을 부추기고 살육에 가담한 일은 일본 불교사의 뼈저린 아픔이다. 종교에서 수행과 각성이 사라지면 일어나는 일이다.

 

내 안에는 와 여러 개의 나들이 공존깨닫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수행

 

우리가 미망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 안에는 일관성 있는 하나의 존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본인도 잘 모르는 여러 개의 나들이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하고 좋아하는 과 같은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그림자같은 또 다른 모습이 내 안 깊은 곳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림자의 나는 우리 무의식 속에 존재하는 경우가 많아서 본인 스스로도 있는지조차 잘 모른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 수행이 깊은 사람도 자기 안의 그림자와 마주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을 겪을 때마다 불쑥불쑥 올라오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인간적 욕구나 보살핌 받지 못한 감정들 때문에 큰 실수를 하기도 하는 것 같다.

 

또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냥 살게 되면 이상하게도 나와 비슷한 그림자를 가진 부류의 사람들이 유독 내 눈에 잘 보인다. 즉 내가 어떤 타입의 사람들을 너무 싫어한다거나 계속해서 비난하고 싶은 것은 어쩌면 내 안에 깊이 박혀 있는 그림자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그와 유사한 숨은 욕망은 없는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자기 안에 있는 그림자를 인지(認知)하고 그 존재 자체를 받아들이게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된다. 단순히 이원적인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빛과 그림자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존재로 받아들이게 된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가 없듯 이 둘은 좋고 나쁨의 영역이라기보다는 하나가 없으면 나머지 하나도 없는 상호 의존하면서도 서로를 변화시키는 관계인 것이다. 더불어 진정한 성자라면 그림자와 같이 어둡고 더러운 것은 내치고 밝고 깨끗함만을 취하려는 것이 아니라, 둘 다 포용하면서도 둘 다에게 물들지 않는 자신의 참모습이 또 있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기에 어떤 나쁜 상황을 만나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자비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수록 가장 하기 힘든 일이 자기가 한 말처럼 자기 행동을 하는 일 같다. 결국 깨달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바로 수행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다.

 

영화 의 끝부분에는 자신이 전쟁터에서 무차별로 저지른 악행 때문에 미쳐서 악령과 싸우는 최고 권력자 호죠 토키요리(北条時頼, 1227~1263)에게 도겐 선사는 악령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자신이 악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과거사를 부정한다 해서 그 사실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받아들이고 참회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린다. 그런 지혜가 없으니 우리는 악업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미망을 헤매어 스스로 상처내기를 거듭하는 것이리라.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기사입력 : 2019-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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