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슈바이처, 헤세…목회자 가정교육이 남다른 점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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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홍 대기자 2019-09-19

1세대 목사 가정 이야기출간역사가 주목한 목사의 자녀들 51인의 전기 수록 

 

앙겔라 메르켈, 알베르트 슈바이처, 헤르만 헤세, 카를 구스타프 융의 공통점은 뭘까? 소설가와 심리학자, 의사와 정치인, 직업으로 볼 때 관련이 전혀 없어 보이는 조합이지만 이들에겐 한 가지 공통분모가 있다. 독일 목사의 자녀라는 것이다.

 

독일을 넘어 세계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이들이 목사 가정에서 배출됐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독일 개신교 교회사학자인 저자 클라우스 핏셴이 목사관(목사와 가족이 거주했던 집) 출신임을 밝힘으로써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냈다고 봤다. 독일인들은 목사 자녀를 떠올릴 때 보통 검약’ ‘엄격함’ ‘정신적 승화등을 떠올린다. 이런 요소들은 대체로 젊은 세대와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목사의 자녀는 사회가 요구하는 행동양식을 가정에서 배우고 익히며 또래보다 빨리 지도력이나 협상 등 사회생활에 긴요한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고 본다.  

▲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 가족은 당시 개신교 성도에게 삶과 신앙의 기준이 됐다. 독일 화가 아돌프 폰 멘첼이 그린 그림 ‘가족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루터’. 사진=홍성사 제공

 

알자스 지역의 목사 아들 슈바이처는 예수의 사랑과 기독교적 윤리가 세계로 확산돼야 한다는 소신으로 아프리카 가봉에서 인술(仁術)을 펼쳤다. 인도 선교사의 아들 헤세는 종교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이 아닌 신뢰와 사랑, 구원을 제시할 것을 기대하며 아시아 종교에 관심을 보였다.

 

독일총리 메르켈은 냉전 시기 동독교회를 돕기 위해 서독을 떠난 목사이자 신학자인 호르스트 카스너의 딸이다. 현재 독일을 대표하는 메르켈은 목사관 출신 인물 중 가장 유명하다. 저자는 목사관에서의 유년 시절과 목사 자녀로 또래집단에서 받은 소외 경험 등이 메르켈의 정치 철학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본다.

 

목사 자녀가 모두 이들처럼 입신양명한 것은 아니다. 저자가 소개하는 목사관 출신 인물 51명 가운데는 테러리스트나 나치 돌격대 중대장도 포함돼 있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처럼 목사 아들이지만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거부하고 경멸한 경우도 있다.

 

책은 목사 자녀들의 인물평뿐 아니라 종교개혁 이후 출범한 목사와 목사 가정의 역할도 비중 있게 다룬다. 목사 가정의 삶은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와 전직 수녀 카타리나 폰 보라의 결혼에서 출발했다. 이들 부부가 생활한 비텐베르크의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은 독일 목사관의 시초다. 이곳은 친척부터 친구 대학생 손님 등이 두루 거쳐 가는 열려있는 집이었다. 개신교 성도에게 루터 가족은 그 자체로 삶의 기준이 됐다. 일반인이 참고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신앙 교본이었던 셈이다. 목사처럼 목사 가족도 공과 사 모두에서 신앙적으로 본이 돼야 한다는 기준이 이때 등장했다. 저자 표현대로 속이 훤히 보이는 유리집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교회 목사 사모나 목회자 자녀가 겪는 어려움과도 비슷하다.

 

급변하는 사회와 목사상의 변화도 집중적으로 다룬다. 산업화와 세속화를 겪으면서 목사는 500년 전 수행했던 교사, 예술가, 의사로서의 역할을 전문인에게 내줬다. 공식 종교의례로 통했던 결혼도 줄어드는 형편이다. 저자는 사회 변화에 전전긍긍하지 말고, 목사관이 현대의 다양한 생활 방식을 수용해 기독교적 가치인 타인에 대한 개방성을 실현할 것을 제안한다. 처한 환경은 다르지만, 이 시대 교회의 역할을 고민하는 한국교회 목회자에게도 시사점을 주는 책이다.  

 

종교개혁부터 오늘날까지목사 가족의 삶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1525, 41세 독신 수도사였던 마르틴 루터는 남편이자 가장이 되었다. 종교개혁의 장본인이자 성직자로서 첫 결혼은 이후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루터가 거주지로 하사받은 수도원은 루터가 결혼하고 가족이 생기면서 목사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처음 텅비어 있던 이곳은 이제 가족들로 채워졌고, 신도들로 북적이게 됐다. 이후 목사의 결혼이 보편화되면서 목사 가족은 관심의 표적이 됐다. 그들의 삶은 일반 시민들이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닮아야 할 모델이자, 윤리적 모범상이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목사와 그의 가족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간다. 그 삶이 운명적으로 주어졌든, 자의로 선택했든 쉽지 않은 길임은 분명하다.

 

독일의 개신교 교회사학자이자, 라이프치히대학교 신학부에서 근현대 교회사 교수로 재직 중인 저자 클라우스 핏셴은 1세대 목사 가족의 시간 속으로 성큼 걸어 들어간다. 그리고 개신교회사에서 목사 가족이 갖고 있는 특별한 의미를 발견한다. 핏셴의 시곗바늘은 16세기 종교개혁에서 멈추었다 다시 각 시대를 지나간다. 그는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추적하며 사회, 경제, 예술, 문화 등에서 목사와 그의 아내, 그리고 자녀들이 보여 주었던 영향력과 흔적들을 발견해 간다. 특히 목사 가족의 역할이 지금까지 어떻게 개신교를 이어 올 수 있게 했는지를 증명하며 개신교회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전해 준다

 

종교개혁 이후 구교와 신교의 혼재 속에 목사의 역할이 더욱 두드러졌다. 각 지역에서 종파를 획일적으로 통일할 때 중요한 중재자 역할을 했고, 사회 변화에 적응해 가는 많은 시민들의 교육을 앞장서 이끌어야 했다

 

 

18세기 경건주의와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며 목사와 그의 가족은 이끄는 역할자로서 더욱 성장의 궤도에 들어선다. 경건주의와 계몽주의는 목사의 새로운 생활양식, 새로운 자의식을 가져왔다. 특히 계몽된 목사는 마을 주민에게 이성, 절제와 절약을 가르쳤고, 과일 재배 방식과 농업을 개혁했으며, 천연두 예방 접종을 도입했다. 계속해서 이 책은 신분사회와 근대의 사이에서 역할 갈등하는 19세기 목사의 모습과, 이후 목사 가정이 세계대전과 나치 시대를 겪는 과정을 그려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이상 유리관 집에서의 삶을 환영하지 않으며, 생생한 현실 속을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목사 가정을 보여 준다.

 

이 책은 목사뿐만 아니라 그의 아내와 자녀들의 삶에도 초점을 맞춘 것이 특징이다. 처음에는 목사의 조력자 역할에 갇혀 매우 보수적인 여성상이 요구되던 목사의 아내가 점차 교회와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확장해 가고 변화되어 가는 모습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묘미는 각 시대마다 소개되는 대표적인 목사 자녀들의 전기이다.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을 비롯해 헤르만 헤세, 니체, 카를 융 등 목사 자녀로서 태어나 자라온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책 속으로

 

개신교 목사관의 원형은 수도원이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의 영주인 선제후(選帝侯) 현자(賢者) 프리드리히Friedrich der Weise(1463-1525)1524년 이 개혁가에게 비텐베르크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거주지로 하사했다. 루터가 이 커다란 집을 넘겨받았을 때, 집은 텅 비어 있었다. 루터처럼 얼마 전까지 이곳에 살던 수도사들은 집을 떠났고, 쓸 수 있는 가재도구들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루터는 거의 텅 빈 업무용 건물을 거주지로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급여가 크게 오르지 않았더라면 건물 수리비를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루터가 결혼하고 가족이 생기고 나서야 비로소 목사관이 됐다. -29, ‘1. 16-17세기 종교개혁 시대에 탄생한 목사 가정에서

 

농촌 목사는 농부이자 시민이었다. 반면 도시에 있는 그의 동료들은 이 이중적인 삶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 시대의 특징을 시민화라 할 것인지 농부화라 할 것인지 묻는다면, 답은 다양할 것이다. 계몽주의나 경건주의 아니면 그 중간적 성향을 지녔건 상관없이, 많은 목사들은 농촌의 시민이자 그의 이웃보다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물론 사회적으로는 농촌 귀족이나 부농과는 다른 계층에 속했다. 새 목사가 부임해야 할 경우, 후원자인 농촌 귀족은 주로 경건주의 목사를 선호했으나, 목사들과 사회적 친분 관계를 맺으려 하지는 않았다. ‘낮은 계층 사람들은 목사를 귀족 주인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귀족 주인과 목사는 사회적 차이가 있었다. 귀족의 아들들은 목사가 되는 것을 소명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목사 고유의 직업의식 및 신분의식은 정해진 사회적 한계 안에서만 형성될 수 있었고, 늘 그렇듯 이런 의식은 각 목사관의 물질적·사회적 여건에 좌우되었다. -109, ‘2. 18세기 계몽주의와 경건주의 시대를 이끈 목사들에서

 

목사 부인의 활동 장소는 대부분 목사관이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는 시민 여성들에게 제공된 사회 여러 분야에서 목사 부인들도 활동할 수 있었다. 주로 전도를 위해 수예협회를 조직하거나 다른 부인들과 함께 구제사업 영역에서 일할 수 있었다. 19세기 후반에는 목사 부인들이 점차 사회복지·초등교육 분야 직업에서 교육할 수 있게 갖춘 능력이 이런 외부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농사의 부담이 덜어짐으로써 목사 부인은 농촌에서도 남편과 함께 시민화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목사의 정원을 경작해야 해서 농사를 짓기는 했지만, 이제 목사 부인은 농부에게 유능한 시민적 살림살이의 수호자가 되었다. 충분한 인력을 쓸 수 없다고 종종 불평하기는 했지만, 목사관에는 농촌에서건 도시에서건 고용인, 즉 하인과 하녀가 여전히 살림을 돕고 있었다. 목사관이 목사 부인에게 부여한 한계는 여전했다. 즉 목사 부인은 남편의 이상적인 조력자였고, 부지런하고 경건하며, 집과 아이들을 돌볼 책임이 있었다. 부분적으로는 예배에 책임이 있어 노래를 하기도 했고, 남편이 아프거나 과도한 부담을 느낄 때면 남편을 위해 일해야 했다. 환자 방문을 맡은 것처럼, 목사관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을 돌봐 주거나 꼭 필요한 것을 장만해 주어야 할 때면, 사회복지기관으로서 봉사할 수도 있었다. -156~157, ‘3. 신분사회와 근대의 사이에서, 19세기 목사의 역할 갈등

 

목사 자녀는 이 모든 것에서 부모의 교육 이상, 다른 아이들의 일상적 삶, 집과 농장에서의 놀이와 책임 사이의 잠재된 갈등에 놓여 있었다. 목사 자녀는 일반적으로 교육 때문에, 혹은 결혼으로 마을을 떠나는 것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마을 아이들은 아니었다. 목사 자녀들을 평범한 사람들의 아이들과 놀게 두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물이 드는 것은 아닌지 등 의견이 분분했다. 그리고 이때 목사 자녀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모범 기능을 이용하는가 하는 관점에서도 의견이 다양했다. 목사 자녀들 중에서 모범적 기능을 보일 수 있는 아이가 있다 해도, 그는 언젠가는 근처에 있는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반면 마을 아이들은 직업의 길로 나섰다. 마을에서 목사 자녀는 다른 지방 명사의 자녀들처럼 공적으로 특별한 지위에 있었다. 그들의 옷차림이나 학교에서 앉는 서열에서 이러한 지위가 드러났다. -159, ‘3. 신분사회와 근대의 사이에서, 19세기 목사의 역할 갈등

 

나치즘이 대두되고, 나치의 지배가 관철되자 많은 사람들은 더욱 희망을 가졌다. 나치 정권이 교회와 기독교의 뛰어난 역할과 결속하겠다는 그럴듯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개신교 목사 중 많은 사람들이 나치즘에 동조했다. 때문에 자동적으로 모든 목사를 나치주의자라 할 수는 없지만, 일부가 동조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치즘 동조가 어디로 이어질지는 물론 금방 명백해졌다. ‘교회투쟁은 처음에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와 그 교회 정책을 수락할 것인가에 관한 내적 분쟁이었다. ‘교회투쟁은 목사들을 서로 반목시켰고, 두 파로 갈라지게 만들었다. 분열된 두 파는 독일 그리스도인들고백교회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파벌을 옹호했다.고백교회의 목사관은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도피처가 되었고,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물론 이런 역할을 하는 목사관이 많지는 않았다. 목사가 체포될 경우에는 목사의 아내가 이런 임무의 일부를 떠맡았다. 많은 목사들이 평범한 군인 혹은 군목으로 일해야 했던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목사관은 하나의 섬이었다. 당연히 위협받는 섬이었다. 나치국가가 부당한 간섭을 서슴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사는 박해받았고 추방당했으며 체포되었고, 목사관은 수색당했고 파괴당했다. 특히 유대 기독교목사들, 즉 조상이 유대인인 목사들은 견디기 어려웠다. 그들은 국가로부터 박해받았으며, ‘독일 그리스도인들의 지지자들에 의해 모욕당하고 목사 지위에서 쫓겨났다. -213~214, ‘4. 1918-1989, 목사 가정의 위기와 변화

 

1963년에 만들어진 노래 가사 한 편이, 그 후 많은 예배에서 불리게 되었다. 이 노래는 교회를 이루는 구성원을 배에 비유했다. “교회 신도라는 이름의 배 한 척, 이 배가 시대의 바다를 지나간다.”이 노래에서는 폭풍과 위험, 선원들의 단결과 배의 목적지, 즉 하나님의 영원에 대해 말하고 있다. 5년 뒤인 1968년 독일 개신교회 기관지라고 할 수 있는 교회연감첫 장에 다음과 같은 문장이 실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강력하고 광범위하며 근본적인 변화의 과정에 있다. 교회의 배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편안하고 안정적인 항해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폭풍과 홍수에 내맡겨져, 얼마나 견뎌내는지 혹독한 시험을 받는다.” -269, ‘5. 오늘날의 목사 가정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기사입력 : 2019-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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