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종교가 가리키는 것은 ‘하나’…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

크게작게

문윤홍 대기자 2020-03-12

‘제나에서 얼나’ 다석 류영모의 생애, 사상과 신앙…깨달으면 하나인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 

 

20세기 한국이 낳은 대표적 사상가이자 영성 철학자 다석 류영모(多夕 柳永模, 1890~1981)는 인간으로서의 에고(몸나, 맘나), 곧 ‘제나’에서 벗어나 영(靈)이 주인이 되는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가리켜 보인 선구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천 가지 만 가지의 말을 만들어 보아도 결국은 하나(절대)밖에 없다. 하나밖에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그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 깨달으면 하나이다. 한얼님의 나가 ‘한나’, ‘하나’이다.

 

사람이 날마다 새롭고 새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한얼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한얼님 말씀으로 살기 위해서는 제나(自我)가 죽어 한얼님의 얼로 눈이 뚫리고, 코가 뚫리고, 입이 뚫리고, 마음이 뚫리고, 알음알이(知)가 뚫려야 참으로 한얼님의 아들인 얼나가 엉큼엉큼 성큼성큼 자라게 된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이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참으로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우리 맘속에 영원한 생명의 불꽃이 타고 있다. 한얼님의 말숨(말씀)이 타고 있다. 그것이 거룩한 생각이다. 사람은 한얼님의 말숨이 불타는 성화로(聖火爐)이다. 이것이 현 존재이다.“
-박영호 엮음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얼나로』 중에서 

 

다석 류영모의 생애
 
다석 류영모는 1890년 3월13일 서울 숭례문 인근에서 아버지 류명근과 어머니 김완전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났다. 5살 때 아버지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6살 때 홍문서골 한문서당에 다니며 『통감(通鑑)』(중국 송나라 휘종 때 강지江贄가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중 대요를 뽑아 만든 역사서)을 배웠다. 10세에 수하동 소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고 다시 한문 서당에 다녔다. 12살 때부터 자하문 밖 부암동 큰집 사랑에 차린 서당에서 3년 동안 ‘맹자’를 배웠다.

 

15세에는 YMCA 한국 초대 총무인 김정식의 인도로 개신교에 입문하여 연동교회에 다녔고, 경성일어학당에 입학하여 2년간 일본어를 공부했다. 1909년 경기도 양평의 양평학교에서 한학기 동안 교사로 일했다. 1910년 이승훈의 초빙을 받아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교사로 2년간 근무했다. 1912년에는 기독교 사상가요 문인인 톨스토이를 연구하여 그 영향으로 기성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톨스토이는 그의 짧은 소설들(‘바보 이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등)에서 드러나듯이,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은 교회에 나가는 종교행사의 충실한 참여가 아니라, 역사적 예수의 삶과 복음을 이웃에 대한 자비, 정직한 노동, 양심적 병역거부, 악을 선으로 이기는 비폭력투쟁 등으로 실천하는 삶이라고 이해했다. 일본 도쿄(東京)에 건너가서 도쿄 물리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학하였다.                                 

▲ 다석 류영모    

 

1915년 김효정과 결혼했고, 이후 최남선과 교제하며 잡지 《청춘》에 '농우', '오늘' 등 여러 편의 글을 기고했다. 1919년 삼일독립운동 때에 이승훈이 거사 자금으로 기독교 쪽에서 모금한 돈 6천원을 아버지가 경영하는 ‘경성피혁’ 상점에 보관하였다. 후에 이것이 적발되어 압수당했으며 류영모 대신 아버지 류명근이 체포되어 105일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1년 조만식의 후임으로 오산학교 교장에 취임하여 1년간 재직하였다. 1928년 YMCA의 연경반 모임을 지도하기 시작하여 1963년까지 약 35년간 계속하였다. 1928년 이전에는 아버지의 경성피혁 상점의 일을 도왔는데, 이후로는 아버지 류명근이 차려준 솜 공장인 경성제면소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후 잡지 《성서조선》에 기고했으며 이 일로 1942년 일제에 의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가 57일 만에 서대전 형무소에서 아들 의상과 함께 풀려났다. 해방 후 행정 공백기에 은평면 자치위원장으로 주민들에 의해 추대되었다.

 

정인보, 이광수와 함께 1940년대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리기도 했던 류영모는 1921년 오산학교 교장을 지내지만 이후 은퇴하여 농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책 『노자』를 번역하기도 했다. 개신교에 입문한 이후 도그마에 물들지 않고 진리 탐구에 매진, 불교와 도교와 유교를 하나로 꿰는 ‘동서통합의 영성철학자’로 거듭났다. 기독교를 한국화하고 또 유·불·선으로 확장하여 이해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대로 ‘20세기 최대의 사건이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라고 한다면, 다석의 가슴속에서는 동서양의 종교가 만나 인류의 미래를 밝혀줄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했다고 할 수 있다. 가르침을 펴기 시작한 이래 줄곧, 몸과 맘의 ‘제나(ego)’에서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 자체인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김교신, 함석헌, 이현필, 류달영, 김흥호 같은 ‘겨레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최근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독창적 종교사상가로서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의 강의 중 일부는 제자들에 의해 남아 있고, 해설과 함께 나오기도 했다. 강의들은 순우리말로 되어 있으나, 기발한 표현이 많고 함축적이어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학자들은 류영모의 종교다원주의가 서양보다 70년이나 앞선 것에 놀라고 있다. 그의 종교사상은 1998년 영국 에든버러(Edinburgh)대학교에서 강의되었다.

 

●류영모와 김효정의 결혼

 

다석 류영모는 "결혼은 안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인격의 온전함이 능히 독신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럴 순 없다. "만일 불완전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완전을 이룬다면 한번 하는 것이 좋아요. 결혼도 하느님을 섬기기 위한 수단입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데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류영모의 주위에는 등장하는 여인이 없다. 오산학교 교사를 지냈고 동경물리학교 유학을 다녀온 류영모이지만 비혼(非婚)을 이상적인 삶이라 생각했던 까닭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듯 사귀어본 사람이 없었다. 곁에서 독신인 그를 지켜본 목사 김필성이 중매에 나선다. 김 목사는 자신의 친구인 김건표의 누이동생 김효정(金孝貞)을 소개한다. 김건표는 류영모보다 7살 위로 전주 신흥학교 교사와 군산 우체국장을 지냈다. 신부가 될 김효정은 충남 한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현성(金顯成), 어머니는 임씨(林氏)이다. 위로 오빠 건표가 있고, 3살 아래의 동생 숙정(淑貞)이 있다. 김현성은 구한말 무관 출신으로 기골이 장대했다. 일찍이 김옥균·박영효와 함께 개화운동에 가담했고 뒷날 전남과 목포에서 공직생활을 했다.

 

김효정은 아버지와 오빠의 직장을 따라 광주·목포·전주·군산·이리 등 호남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았다. 효정과 숙정 자매는 군산에서 소학교 3년, 중학교 3년 과정의 학교를 다녔다. 여학생이라고는 두 자매뿐이었다. 장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학교에 다녔다.

 

여름에는 덮어 쓴 장옷으로 잔등에 땀띠가 나 고생을 하였다. 나이 많은 남학생 틈에 자매가 학교에 다닌다고 사람들의 구설수에 올랐다. 어찌나 말이 많던지 자매가 도중에 학교에 가기를 그만두었다. 학교 측에서 집으로 찾아와 자매가 학업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 두 사람이 도중에 그만두면 앞으로 다른 여학생들이 입학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자매는 다시 학교에 나가 졸업을 했다.

 

동생 숙정은 서울에 와서 경기고녀를 졸업한 뒤에 교사가 되었다. 효정의 부모는 오빠와는 달리 신랑감 류영모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부친은 사위도 자신처럼 건장한 무인형(武人型)을 바랐다. 류영모는 작은 체격에 지적인 면모의 선비형이다. 류영모는 "지금은 서울에 살지만 앞으로 시골로 가서 농사지으며 살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 때문에 효정의 모친이 싫어했다. 사위 될 사람이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다면 체력이 약한 맏딸이 농사바라지를 감당해낼 수 없을 거라고 걱정했다. 남편 따라 밭이랑에서 김 매고 오줌항아리를 이고 나르고 마당질에 도리깨질을 해야 할 터인데 효정의 체력으로는 역부족이란 것이다.

 

●어긋날 뻔한 혼담 성사시킨 류영모의 서신

 

김효정은 나중에 팔순이 되었을 무렵, 류영모와 혼담이 있던 처녀 때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오빠의 말씀이 신랑 될 사람은 학식이 깊고 생활이 철저한 사람이라고 하였어요. 사람은 참되게 살려면 농사짓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반드시 국산품을 쓰는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된다고 이야기했어요.“

 

류영모는 당시 목포에 살고 있던 신부감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중매하는 김필성의 얘기만 듣고 참한 규수라 하여 혼사가 이뤄지기를 바랐다. 그런데 장인·장모될 분들이 완강하게 반대를 한다니 난감했다. 시골에 가서 농사지으면서 살겠다는 소리만 하지 않았어도 혼담이 그렇게까지 꼬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류영모는 생각 끝에 장인이 될 김현성에게 허혼(許婚)을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김효정의 집에서는 류영모의 편지를 받고 술렁이었다. 사위가 될 사람으로부터 장인 될 사람에게 편지가 왔으니 그때로는 흔한 일이 아니었다.

 

김현성은 사윗감 류영모의 편지를 읽고는 그 문장과 글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둘째 딸 숙정이를 불러서 읽어보라고 했다. 언니 효정이 사랑방에서 나오는 숙정에게 편지에 무슨 말이 씌어 있더냐고 물었다. 숙정의 대답은 이러했다. "붓글씨로 쓴 편지글이 논어를 읽는 것 같았어.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어." 당시 숙정은 목포에서 교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어려운 한자가 많았을 거라는 짐작은 하지만, 학교 교사도 못 읽는 글이라니, 대체 뭐라고 썼기에 그랬을까? 그렇다고 아버지께 물어 볼 수도 없었다. 류영모는 이 편지 한 장으로 혼담을 성사시켰다. 당시 풍속은 신랑이 장가(처가집)를 드는 것이었다. 그런데 신랑 류영모는 신부에게 시집(시가)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임금이 아내를 맞아들이는 친영례(親迎禮)와 같이 잔치를 치러야 한다고 했다. 굳이 양가를 오가는 이중잔치를 벌일 필요 없이 처음부터 시댁으로 오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서로 이런 논란이 오가던 끝에, 신부 집에서 양보를 했다. 장인 김현성은 혼례에 오지 않았고 오빠인 김건표가 누이를 데리고 서울로 왔다. 신부 김효정은 목포항에서 인천항으로 가는 여객선을 탔고 인천에서 서울로 가는 경인선 기차를 탔다. 신부는 배멀미와 차멀미를 연속으로 했다.

▲ 류영모·김효정 부부    

 

●"남녀는 최선 다하라" 주례사에서 읽은 성경구절

 

서울 종로구 당주동 신랑집 마루에서 혼례가 올려졌다. 목사 김필성이 주례를 맡았다. 신부도 14살 때부터 교회에 나간 기독교 신자라 교회식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데는 의견이 일치했다. 신랑 류영모는 주례에게 예식 때 읽을 성경구절을 미리 지정해 줬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편지인 고린도전서 7장 1절에서 6절까지였다.

 

"남자와 여자는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음행이 성행하고 있으니 남자는 자기 아내를, 여자는 자기 남편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남편은 아내에게 남편으로서 할 일을 다하고 아내도 그와 같이 남편에게 아내로서 할 일을 다 하십시오. 아내는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남편에게 맡겨야 하며 남편 또한 자기 몸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직 아내에게 맡겨야 합니다. 서로 상대방의 요구를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서 서로 합의하여 얼마간 떨어져 있는 것은 무방합니다. 그러나 자제하는 힘이 없어서 사탄의 유혹에 빠질지도 모르니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명령이 아니라 충고입니다.“

 

혼례를 올린 때가 1915년 9월, 늦더위가 느껴지는 초가을이었다. 25살의 신랑은 무명 바지저고리를 입었고, 22살의 신부는 옥색 치마저고리를 혼례복으로 입었다. 김효정에게 오빠 김건표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남편은 훌륭한 분이다. 네가 남편의 뜻을 거스르면 너와 나 사이에 남매의 의를 칼로 자르고 소금을 치듯 끊을 것이다."

 

58년 전의 얘기를 80살이 된 김효정이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오빠의 말을 깊이 품고 평생을 살아온 것이다.

 

●신랑 류영모, 첫날밤 실종 사건
 

혼례식을 올린 류영모는 그 길로 호남선 목포행 열차를 타고 목포에 있는 처가로 향했다. 신부의 부모님을 뵙기 전에는 감히 신방에 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신부는 신랑이 신방에 들기를 기다렸다. 밤이 늦도록 신랑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신부가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다만 신랑이 행방불명이 된 셈 치고는 집안이 너무 잠잠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장가든 날 신부보다 더 중요한지 궁금했다. 신식 혼례를 올렸으니 신랑이 풀어 주어야 하는 족두리가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옛말에 집안이 쓸쓸하면 맏딸 시집보낸 집 같다고 한다. 22살이 되도록 고이고이 기른 딸을 멀리 서울로 시집보내고 부모는 쓸쓸한 마음과 온갖 걱정을 보태면서 집안을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누구인가. 새신랑인 사위 류영모가 목포 처갓집 대문 안으로 쑥 들어온 것이다.

 

두 사람은 기겁하듯 놀랐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여길?” 마땅히 서울에서 신부와 함께 있어야 할 신랑이 홍길동처럼 목포에 나타났으니 예삿일은 아니다. 사위 류영모는 집 안으로 들어서서 장인·장모에게 인사를 올렸다. “어찌 신부를 혼자 두고 이곳에 왔는가?” 이렇게 묻자 류영모는 이렇게 말한다. “장인·장모님에게 인사를 올리기 전에 어찌 신방에 들 수 있겠습니까?” 이걸 나무라야 하나, 고마워해야 하나. 장인·장모는 난감한 표정 속에서도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그리고 신랑의 손을 덥석 잡았다. “우리를 그렇게 깊이 생각해 주다니 고맙구려.”

 

●욕망의 경솔을 제어하기 위한 청년의 선택

 

그렇게 장인·장모의 대화는 오래 이어졌고, 사위의 식견 속에서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지니게 되는 듯한 느낌을 받은 장인은 문득 이런 말을 꺼낸다. "여보게, 자네 얘기들이 실상을 꿰뚫고 있고 나라의 뒷날까지 깊이 걱정하고 있는 대장부의 기개까지 느껴지게 하네. 우리 둘째 딸 숙정이가 있네. 자네 부인이 된 첫째와는 세 살 터울일세. 맏사위가 둘째의 인연도 한번 찾아주심이 어떻겠는가?"

 

그러면서 경탄을 이어갔다. "5척 단구(短軀)에서 어떻게 그런 기개와 담론이 나오는지 궁금하기까지 하네." 키가 작다는 건, 장인이 처음에 그를 마뜩잖아 했던 이유가 아닌가. 류영모는 이렇게 말을 한다. "5척의 키나 8척의 키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이지만, 우주에 비하면 얼마나 작겠습니까. 신체의 자잘한 것에 얽매여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 있는 우주를 살피지 못한다면, 그 눈이 어찌 높고 큰 것이겠습니까. 학교에 있을 때 천문학과 물리학을 배우고 가르쳐, 세상을 이루는 보다 큰 것에 대해 관심을 지니게 되니 소소한 차이들에서 마음을 쓰는 일들이 부질없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니 단구와 생각의 크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 말에 호쾌한 무골인 장인의 입이 하릴없이 닫히고 말았다. 류영모는 처가의 큰 대접을 받고 귀경하는 길에 관촉사에 들러 은진미륵보살입상을 구경했다. 논산의 대장간에 들러 솥을 만드는 장면을 보기도 했다. 신부를 두고온 신랑으로선 속 터질 만큼 느긋한 행보였다. 서울의 김효정과 재회한 것은 첫날밤이 일주일이나 지난 뒤였다. 대체 왜 이토록 사랑의 입방(入房)을 늦췄을까. 그가 직접 이에 대해 말한 바는 없지만, 젊은 나이로 조급해지는 마음을 바로잡고 사랑의 이름을 빌린 욕망의 경솔을 제어하고자 함이었을지 모른다.

 

류영모는 결혼 2년 뒤인 1917년에 첫아들 의상(宜相)을 낳았다. 1919년엔 둘째 자상(自相)을, 1921년엔 셋째 각상(覺相)을 두었다. 아들 셋의 이름에 항렬 자 상(相)을 빼면 의자각(宜自覺)이 된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으라. 그는 별 뜻 없이 이름을 지었다고 말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그가 아들들이 어떻게 하기를 바랐는지 느껴지는 대목이다. 1926년에 낳은 딸의 이름은 월상(月相)이었다. 음력 보름에 낳았기 때문이었다. 자식들의 이름을 모두 이어보면 의자각월(宜自覺月)이 아닌가. '마땅히 스스로 깨닫아 달처럼 환해져라',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스스로 깨달아 달처럼 환해지는 일은 부모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핏줄에 대한 애착을 담은 말도 아니다. 태어난 이상, 스스로 그 정신의 길을 찾아서 가야 한다는 진정어린 애정의 충고이다.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달처럼 돋으라

 

류영모는 자식을 잘 길러 훌륭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이 어리석다고 보았다. 자식은 결국 육신이 품는 희망일 뿐이다. 후손이 끊어질 것을 고민하던 나라가 결국 어떻게 되었느냐고 묻는다. 정신이 끊어지지 않아야 나라가 산다고 말한다. 정신을 이어주는 것이 육신을 이어주는 것보다 낫다는 것이다. 이런 면모를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이름 속에 넣어놓은 '의자각월'은 '정신 잇기'의 염원이 아닐까 싶다. 육신으로는 내가 낳았지만 정신으로 거듭나는 것은 너희 스스로 하늘의 아버지에게로 나아가 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 마땅히 스스로 깨달아 돋아 오르는 달이 아닌가. 류영모의 결혼생활은 담담하고 아름다웠다. 김효정과 회혼(回婚)을 넘기며 백년해로했다.

류영모의 처가, 즉 김효정 친정집안의 뒷날을 훑어보면 이렇다. 류영모의 처남 김건표는 뒤에 서울에 와서 살았다. 만년에는 출판사에서 청탁하는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출판사와 인연을 맺고 일을 하는 처남의 권고로 당시의 도량형에 관한 책을 편술하여 이름을 『메트르』라 하였다. 류영모는 처남을 돕겠다는 생각으로 그 일을 했던 것인데, 나중엔 아예 개성사(開成社)라는 출판사를 열게 됐다. 개성(開成)이란 역경(易經)의 계사전에 나오는 개물성무(開物成務, 만물의 뜻을 열어 천하의 일을 성취함)를 뜻한다. 『메트르』를 판매하기 시작했을 때 출판사를 경영하는 일본 사람이 자사 출판서적을 표절했다고 소송을 제기해 왔다. 도량형의 원기(原器)를 실은 것을 트집 잡은 것이었다. 도량형의 원기는 인류 공동의 표준기기로 표절이라 할 수 없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강점기요, 일본 사람의 소송이라 패소한다. 개성사는 책도 내보지 못한 채 그만두었다.

 

처남 김건표는 자녀를 못 두었기에 처가의 손(孫)은 끊어졌다. 김건표의 아내(류영모의 처남댁)는 90살이 넘도록 장수하였다. 류영모가 사준 땅에 지은 전주 동광원에서 살다 돌아갔다. 처제 김숙정은 혼인하여 오류동에서 거주했다.

 

류영모와 김정식·조만식·우치무라와의 만남

 

1912년 오산학교를 그만두고 나온  22세의 다석 류영모는 길 위에 서서 학교 건물을 돌아보았다. 늦가을 오후 교사로 2년을 근무했던 교정엔 마른 잎들이 떨어져 구르고 있었다. 서슴없이 제 나무를 버린 저 잎들은 다시 시작될 새로운 생을 준비하는 거름이 되리라. 그에게 지난 2년은 다양한 동서양 학문을 접하는 기간이기도 했지만 이승훈, 여준, 이광수, 안창호, 신채호, 윤기섭 등 당대의 지식인·교육자·독립운동가들을 만나 그들의 열정과 지식과 신념에 감화를 받던 때였다.

 

오산학교 교사 시절은 그에게 사상적인 격동기이기도 했다. 이 학교에 교리 기독교를 전파했던 류영모는 톨스토이와 일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로서 서구적 기독교가 아닌, 일본인들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가르침 즉, 일본적인 기독교를 찾고자 했음)의 영향을 받으면서 신앙적 성찰을 심화한다. 성서와 톨스토이 저서, 불경과 도덕경을 숙독하면서 그의 기독교 사상은 이미 시스템화 돼 있는 교회와 교리의 종교체계에 대한 깊은 의문을 키워갔다.

 

이 의문은 신앙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되었고, 불교와 유교, 노·장사상과 같은 동양적 신념체계들과의 뿌리 깊은 공통점을 발견하는 계기를 만들었을 것이다. 오산학교에 머문 지 1년이 되었을 때 두 살 아래 동생 류영묵의 죽음을 겪었고, 생사관(生死觀)에 대해 고심참담했기에 그의 사상은 더욱 집요하게 진실을 탐문해 들어가고 있었다. 종교는 필연적으로 '피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를 풀어가는 길이기도 하다.

 

학교를 떠났지만, 그의 마음속엔 학문과 사상의 갈증이 깊을 대로 깊어져 있었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국내엔 대학이 없었기에 일본 유학을 택했다. 류영모는 지식을 더 다져 다시 오산학교에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과학교사가 필요한 그곳을 생각하며, 대학의 전초단계 과정(예비학교)이라 할 수 있는 도쿄(東京)물리학교에 들어간다. 1912년 9월의 일이다. 그런데 그는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대학 입시를 포기했다. 그리고 이듬해 6월 귀국한다.

 

●깊어진 사상의 갈증 그리고 세 사람

 

갑작스럽게 대학에 가지 않기로 한 이유는 뚜렷하지 않다. 류영모는 이 무렵(일본 재학)이 인생에서 가장 고민스러웠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 고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학문을 계속하는 일이 그의 사상과 신앙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리학자가 되는 일보다, 당시의 그에겐 신학사상가가 되어 식민지 조국의 정신성(精神性)을 일신하는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데에는 일본 체류시절 느꼈던 도쿄의 어떤 '공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류영모는 도쿄에서 그의 생에 큰 영감을 준 세 사람을 만난다. 김정식과 조만식, 그리고 우치무라 간조다.

 

삼성(三醒) 김정식(金貞植, 1862~1937)은 황해도 해주 출신의 독립운동가로, 류영모에게 예수를 알게 해준 일생일대의 은사이다. 1905년 15세의 류영모는 연동교회에서 김정식을 만났고 그를 통해 성경을 읽게 됐다. 김정식은 대한제국 시절 경무관을 지냈는데, 독립협회 사건에 연루되어 1902년 국사범(國事犯)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됐다. 이때 선교사 게일이 감방에 넣어준 신약성경을 읽는다. 4대 복음을 읽으면서 예수의 생애를 돌아보며 큰 위로를 받았다. 몹시 억울한 상황에서 예수가 취한 의연한 태도는 성스럽게 여겨졌다. 김정식은 성경을 7번 읽었고 8번째 읽는 가운데 1904년 무죄 석방이 된다. 

 

김정식의 옥중 신앙고백서는 절절하여,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정도였다.

 

"나는 육신의 부모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내 불쌍한 사정을 고할 곳이 없으되,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지극히 친절하시고 지극히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 형님께 고하옵니다. 나의 사랑하는 딸 앵사는 나이 10살도 안 되었을 때 두 눈이 멀어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을 로마교황(가톨릭) 양육원에 보냈으니, 때때로 부모를 찾아 부르짖을 생각을 하면 뼈가 저리고 오장이 녹는 듯합니다. 이 세상에는 나 같은 악한 죄인도 없었고 지금 이같은 깨끗한 마음을 얻은 사람도 나 혼자뿐입니다. 차후 어떤 지경에 처할지라도 이 은혜를 잊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전날에 지은 죄로 오늘 이 같은 긍휼(矜恤, 가엾이 여김)을 받기는 진실로 뜻밖입니다. 이 몸이 옥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어찌 이런 은혜를 얻었으리오."
-김정식의 옥중 신앙고백서 중에서

 

●다석, '믿음의 은사' 김정식과 재회

 

감옥에서 나온 김정식은 캐나다인 게일 선교사(James Scarth Gale, 奇一, 1863~1937)의 권유를 받고 연동교회와 YMCA의 일을 하게 된다. 그는 연지동, 지금의 연동교회 자리에 있었던 애린당(愛隣堂, 이웃사랑의 집)에 살았다. 감옥에서 출발해 신앙 입문 3년차에 이른 43세 김정식은 15세 류영모에게 자신을 그토록 놀랍게 바꾼 예수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류영모는 예배시간이 아닌 때에도 애린당에 찾아가 여러 가지 일을 도우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렇게 함께 지냈던 ‘믿음의 스승’를 류영모는 7년 뒤에 도쿄 한복판에서 만난 것이다. 식민지의 척박한 삶 속에서 살아 있는 것만도 반갑던 시절에, 이국땅에서 '믿음의 스승‘을 만난 일은 그야말로 축복 받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김정식은 류영모의 손을 잡고 가족에게로 데려갔고 사진도 찍었다. 

김정식은 어떻게 도쿄에 와 있었을까. 을사늑약 체결 이후,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잡는다'는 암암리의 공감대가 커지면서 한국인의 일본 유학이 늘어났다. YMCA는 한국 유학생들이 뭉칠 수 있는 구심점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도쿄에 ‘재일본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세운다. 1906년 8월 서울 YMCA에서 일하던 김정식이 파견되어 도쿄 총무직을 맞는다. 이 건물은 1919년 2월8일 그 유명한 재일유학생 2·8독립선언서를 발표했던 곳이다. 한국 유학생들은 거의 모두 김정식의 지원을 받았다. 조만식, 안재홍, 김규식, 송진우, 장덕수, 신익희, 김병로, 이광수 등 쟁쟁한 명사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메이지대 법대생 조만식과의 만남

 

김정식은 ‘신앙의 제자’ 류영모에게 고당(古堂) 조만식(曺晩植, 1882~1950)을 소개해준다. 재일본 유학생들은 종파를 초월한 연합교회를 만들어 함께 예배를 드렸는데 거기에서 류영모는 조만식을 처음 만났다. 조만식은 같은 평안도 사람인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 1864~1930: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을 알고 있었기에 오산학교 교사로 지낸 류영모를 더욱 반가워했다. 그의 하숙집이 류영모가 기거하는 곳에서 가깝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류영모는 메이지(明治)대학교 법과 졸업반이던 조만식을 자주 찾아가 얘기를 나눴다. 훗날 '조선의 간디'라는 별칭으로 남게 된 위대한 인물 조만식은 그때 눈빛이 형형한 청년에게 문득 이런 얘기를 꺼냈을지도 모른다.

 

"요강을 잘 닦으시오."

 

류영모가 무슨 뜻인지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어린 날 동네 부잣집 머슴이었소. 내가 할 일은 요강 닦는 일이었지요. 나는 매일 있는 힘을 다해 요강을 닦고 또 닦았소. 어느 날 주인이 나를 불러 공부를 하고 싶으냐고 물었습니다. 그러더니 내게 학비를 대주었습니다. 작은 일에서 최선을 다하다 보면 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그는 이런 말도 했을지 모른다. "애국 애족하는 길에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내가 죽은 뒤에 누가 있어 비석을 세우려거든 거기에 비문은 쓰지 말라고 하고 싶소. 다만 큰 눈을 두 개 그려주면 좋겠습니다. 저승에 가서라도 한 눈으로 일본이 망하는 것을 지켜보고 한 눈으로 조국이 자주독립하는 것을 지켜보려 합니다." 고당 어록에 있는 말들이다. 23세 류영모에게는 한 마디 한 마디가 깊은 울림으로 남았을 것이다.                                

▲ 고당 조만식  

 

인연은 오묘하다. 조만식이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을 때 옥중에 있던 이승훈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로버트 교장이 들어온 뒤 기독교 신앙통제가 심해진 오산학교를 민족정신의 성지로 바로잡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조만식은 뜻이 그러하니 석달만 맡아 수습해 주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그는 9년간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이 학교의 기풍을 제대로 갖춘 큰 교육인으로 길이 남았다. 그는 오산학교 기도회에서 이렇게 교장설교를 했다고 한다.

 

"사람을 사랑합시다. 그리고 겨레를 사랑합시다. 옳은 사람이 됩시다. 그러기 위하여 예수를 믿읍시다."

 

이런 조만식의 뒤를 이은 교장은 류영모였다.

 

다석에게 기독교 사상에 깊은 영향을 준 일본인 신학자 우치무라 간조에 관한 얘기다. 류영모가 일본에 갔던 1912년 우치무라는 51세였다. 그는 한 살 아래인 김정식(도쿄 조선기독교청년회 총무)과 친구처럼 지냈다. 우치무라 일기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아침에 신앙의 벗인 경성의 김정식군 방문이 있었다. 3년 만에 만나서 대단히 반가웠다. 그는 장로교회에서 일하지만 그 신앙에 물들지 않았음을 알고 기뻤다. 그가 고국의 일을 말할 때에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고 나도 따라 울지 않을 수 없었다. 둘이 기도를 같이 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헤어졌다."(1919년 5월19일)

 

김정식과 절친이었던 우치무라의 강연

 

"오래간만에 조선 김정식군이 찾아왔다. 변하지 않는 신앙의 빛으로 빛나는 그의 모습을 보고 기뻤다. 그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본과 조선의 합동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정치가나 군인이나 실업가는 모른다. 나는 일본인이고 김정식은 조선인이지만,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형제이다. 김군은 나의 신앙을 이해해주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그와 만날 수 있는 걸 감사한다."(1922년 11월7일)

 

이 엄혹한 시절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우치무라 간조는 누구인가.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근대 일본 건설과 한국 병탄의 기초를 구축한 정치가)를 저격했을 때 이렇게 말했던 사람이다(잡지 '성서의 연구', 1909년 12월호).

 

"나는 조선을 위해 이 일을 기뻐한다. 이 나라는 지금 실제적으로 국토를 잃고 정부를 잃고 독립을 잃고 참으로 비참한 상태에 있다. 자비로운 하느님이 지상에서 이들 조선인의 손실에 대해 영적인 것을 가지고 그들에게 보상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본인의 하느님은 또한 조선인의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후하시고 그들에게는 박하실 분이 아니다. 하느님은 틀림없이 무언가를 가지고 조선인의 지상에서의 손실을 메워주실 것이다. 지상에서 저주를 받았으면 하늘에서 은총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조선이 은혜로운 아버지에게 자비를 입을 것을 간절하게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이 표방하는 평등과 사랑의 논리로 보자면 당연한 말일 수도 있지만, 당시 일본 제국주의가 탄력을 받던 시기에 일본 지식인이 자국의 통감 피살 사건에 대해 이같은 논평을 내놓는다는 것은 대단히 용감한 일이 아닐 수 없어 보인다.                            

▲ 우치무라 간조    


●주체적인 기독교 교리해석을 고민하다

 

김정식은 조선 유학생들을 위한 강연회에 우치무라를 강사로 자주 초빙했다. 류영모는 도쿄물리학교에 다니는 동안 몇 차례 우치무라의 강연을 들었다. 하지만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류영모는 우치무라가 서양에서 출발한 기독교를 그대로 일본을 비롯한 동양에 이식하는 것에 대해 갖는 문제의식은 공유했지만, 교회와 교리 문제, 일본 국가주의와 신앙을 일치시키려는 문제 등에선 일정한 이견을 드러낸 바 있다.

 

하지만 우치무라가 이 땅의 초기 기독교 정착 과정에서 주체적인 '교리 해석'에 눈뜨게 했고 독립운동과 같은 국가적 현실논리의 신앙적 구현을 고민하게 했다는 점에서, 그의 종교사적 존재감은 지금도 상당해 보인다. 류영모가 우치무라의 신앙적 실천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했다는 사실과는 상관없이, 청년시절 '영성(靈性)의 주체성'을 새롭게 세우는 계기를 우치무라에게서 자양분처럼 섭취했을 가능성은 여전히 크다.

 

●우치무라 '무교회'는 서양식 기독교에 대한 반대

 

우치무라의 경우, 삿포로 농학교에서 놀라운 형제애를 체험했던 '7인형제의 작은 교회'의 함의(含意)를 신앙적 신념으로 발전시켰다. 교회와 목사 중심의 서양 기독교가 아니라, 교인들이 신앙적으로 평등하며 자발적인 형식으로 움직이는 '교회 아닌 교회'를 실천한 것이다. 일본 기독교에 서양 전통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뿌리 깊은 애국적 주체성의 발로이기도 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無敎會)’는 교회를 반대한 것이 아니었다. 교회의 제도주의와 성례전주의를 거부한 것이다. 제도주의는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계급시스템이다. 믿음 안에서 신도들은 철저히 평등하다는 얘기다. 또 신앙을 형식에 가두거나 교파적 신조가 구원을 독점한다고 주장하는 교파주의 혹은 배타주의를 비판했다. 예수 이후에 생겨난 인위적인 형식과 구분들이 본질적인 신앙을 오히려 훼손하거나 왜곡한다고 본 것이다.

 

성례전주의는 세례와 성만찬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다. 세례는 죄를 정화시키는 기적적인 힘이 있는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신앙생활의 상징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념하는 성만찬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기독교인들이 형제·자매로 거듭나는 신앙행위라고 해석했다.

 

우치무라는 말했다. "나에게 교회는 없지만 그리스도는 있다.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내게도 교회가 있고, 그리스도가 나의 교회다." 그는 새로운 '교회' 운동을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새롭게 읽을 것을 제안했고, 그것이 '성서연구회'다. 기존의 기독교계에서는 성서를 연구한다는 시도 자체가 불경이었다.  

 

●임종 때에도 인류의 행복과 일본 융성을 말한 우치무라

 

우치무라 간조는 70세인 1930년에 눈을 감으며 "인류의 행복과 일본국의 융성과 우주의 완성을 기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예수와 일본을 늘 함께 생각했던 애국적인 신념을 드러낸 유언이었다. 그가 일본을 비판할 때도, 거기엔 깊은 애국심이 바탕으로 깔려 있었다.

 

그가 남긴 사상인 '무교회주의'는 평생 투쟁적으로 살았던 신앙적 삶의 기반 같은 것이었다. 또한 세상에 남겨놓은 결실이기도 하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무교회주의는 나의 신앙이다. 혹자가 감리교회 신자이고 혹자는 침례교회 신자이고 혹은 성공회 신자이고 회중교회 신자인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무교회 신자이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는 류영모가 교회를 탈피하면서 주창했던 비정통 기독교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 문제에 대한 제대로 된 접근은 류영모 신앙이 지닌 독보적이고 근본적인 가치를 돋을새김하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류영모는 톨스토이의 신학적 입장과 마찬가지로 '교회' 자체가 성서에는 없는 기업적 시스템이며, 예수의 초인적 면모나 '기적' 또한 믿음을 돋우고자 후세에 덧붙인 가필일 뿐이라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에, 교회를 중심으로 교파를 형성하고 그밖의 신앙행위를 이단으로 배격하는 서양기독교의 골격에서 스스로 이탈하고자 했다. 그는 정통을 표방하는 교회들을 비판함으로써 이런 생각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교회를 나와 성서 속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가르침을 가려내고 동양적 통찰과 함께 적용하여 그 보편성을 실천하는 길을 걸었다.

 

●조선산 기독교를 주창한 김교신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기독교를 계속해서 새롭게 표현하는 영적인 것으로 이해한 우치무라의 주장들을 '진정한 복음'이라고 믿었다. 복음의 진리를 일본 역사현실 속에서 실천하려는 우치무라는 그에게 진정한 기독교적 예언자로 여겨졌다. 그는 1927년부터 조선성서연구회 5명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한다. 이 잡지는 1942년 일제에 의해 폐간된다. 그는 이 잡지에서 '조선산(朝鮮産) 기독교'를 주창했다.                         

▲ 김교신    

 

일본은 김교신이 독립운동을 한 혐의로 체포해 감옥으로 보냈다. 1944년 전염병에 걸린 조선노동자를 간호하다가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조선 무교회'는 친구였던 함석헌에 의해 주도된다. 그러나 함석헌은 해방 정국과 한국전쟁의 격랑 속에서 우치무라의 무교회를 벗어나 새로운 역사 현실 속으로 들어간다.

 

우치무라는 당시 조선에 대해 과감한 우호적 발언을 하기도 했지만, 3·1독립운동의 일제 탄압과 관동대지진의 대학살에 대해선 침묵했다. 김교신이 조선의 독립문제에 대해 질문하자 "영국과 스코틀랜드 관계처럼 되면 좋지 않겠느냐"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적 평등관을 실천하고자 했지만, 일본에 대한 애착을 넘어선 보편적 투철함은 지니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까닭에 "우치무라는 조선의 영적인 세계까지 노리는 영적 제국주의의 야심가"라는 맹렬한 국내 비판(김린서)까지 받기도 했다.

 

류영모는 비교적 우치무라에 대한 말을 아꼈지만, 자신과의 차이를 이렇게 말했다. "그는 외국 선교사에 반대하여 사도신경 정신에 입각해 교회 본래의 정통신앙을 세우고자 했죠. 나와 톨스토이는 (교회를 벗어난) 비정통신앙입니다."  

 

톨스토이 사상을 이해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 한 류영모

●20세기 한국 문명을 깨운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는 영변의 아래쪽에 있는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고려 강감찬 장군이 거란을 물리친 귀주대첩으로 유명하다. 귀주(龜州)는 정주의 옛 이름이다. 조선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란 갈 때 사흘간 머물렀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던 곳도 이 일대였는데, 관군이 난을 진압한 뒤 정주는 ‘반역향(叛逆鄕)’으로 찍혀 정원현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이곳은 조선 500년간 과거 급제자를 280여명이나 배출하여 한양을 제외하고는 합격자를 가장 많이 낸 학향(學鄕)으로 손꼽혔다.

 

1905년 경의선이 개통되면서 정주역이 생겼고 교통의 요지로 발달한다. 오산학교가 설립되던 1907년 정주군의 인구는 4만2000여명으로 북적이는 도시였다. 이곳은 근대에도 수많은 인물을 배출해 '20세기 초기 근대화를 이끈 요람'으로 손꼽힌다. 문학가 백석과 이광수, 종교인 문선명(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시자), 언론인 방우영(전 조선일보 회장)의 고향이다. 특히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정주에서 3개 교회를 개척한 문선명 총재의 종조부 문윤국 목사는 오산학교 설립에도 뜻을 같이했다, 문 총재는 생전에 펴낸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에서 문 목사를 ‘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이라는 제목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문 목사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문 목사는 정주에서 목사로 봉직하던 중 3.1독립운동 평안북도 총책임자로 오산학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옥고를 치렀다. 문 목사는 3·1운동 독립선언서에 33인의 민족대표로 권유받았으나 스스로 물러나자 기독교계 대표 이승훈이 거사 실패 후의 후사를 당부하고 민족대표 명단에 빠짐으로서 그의 명성은 자연히 묻히게 됐다.                         

▲ 오산학교 설립자 남강 이승훈  

 

이승훈의 주도로 설립된 오산학교(정주군 갈산리 오산)에는 여준·윤기섭·류영모·장지영·이광수·염상섭·김억이 교사를 지냈고, 교장으로는 백이행·이종성·박기선·조만식·류영모·주기용 등 뛰어난 교육자들이 학교를 키워냈다(류영모는 교사와 교장을 모두 지낸 오산학교의 핵심 교육자였음). 백인제·김홍일·함석헌·이중섭·김소월이 이 학교 출신 학생이며, 김기석·주기철·한경직 목사도 오산학교를 나왔다. 학생 7명에 교사 2명으로 부랴부랴 창설했던 이 작은 학교(4년제 중등과정)가 일제 치하 식민지의 독립운동과 주체적 종교운동의 산실이 되는 과정은 드라마틱하고 감동적이다.

 

1907년 12월24일 학생과 학부모를 합해 20여명이 참석한 개교식에서 이승훈이 발표한 개교사는 이렇다.

 

"이 아름다운 강산, 선인들이 지켜 내려온 이 강토를 원수인 일본인들에게 내맡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총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자를 나무라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오늘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진들을 가리켜 만분의 일이나마 나라에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을 한데 모아서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 

 

평북 구성에서 태어난 김소월은 오산학교 재학시절 교사 김억의 영향으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22년 《개벽》지에 실린 '진달래꽃'은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이란 표현으로 등장하는 이 일대(영변 약산 제일봉과 학벼루)의 아름다운 풍광은 황폐한 식민지 민족의 가슴에 잊을 수 없는 향수를 아로새겼다. 또 다른 국민시인으로 인정받는 백석을 낳은 것만으로도 오산학교는 '위대한 시의 메카'로 불릴 만하다.


●춘원 이광수와 교대한 물리선생 류영모

 

류영모가 오산학교에 부임한 때는 1910년 10월1일이었다. 8월29일이 국치일(國恥日)이었으니 한달 남짓 지난 무렵. 빼앗긴 들에도 계절은 오고 있었다. 평북 정주엔 곱기만 한 단풍이 들고 산들바람 속에서 갈잎의 노래가 들려왔다. 교사 류영모가 간 오산학교엔 아직 1회 졸업생도 배출하지 못했다. 4년제 학교에서 아직 3학년이 최고 학년이었던 때다. 1907년 12월 24일에 설립했으니 3년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생은 모두 합쳐 80여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한옥이었던 오산학교에는 딴 지역에서 유학을 온 학생들이 합숙을 했다. 전원이 기숙사 생활이었다. 교사 류영모는 당시 3학년이던 김여제, 이인수와 한 방을 쓰며 기거했다. 교사와 학생이 나이도 어슷비슷했다.

 

한해 전에 먼저 온 선생으로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있었다. 과학 교사를 맡고 있던 이광수는 18세였고, 류영모는 두살 위인 20세였다. 류영모는 이광수를 만난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처음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인데도 서로 말을 주고 받으면 공명을 느껴 금방 동지가 될 수 있다. 이런 일은 흔하지가 않다. 죽을 때까지 사귈 수 있는 친구도 이렇게 맺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사상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라는 사람을 알고 몇 백리 밖에서 찾아오는데 죽마고우를 만나는 것같이 금방 익숙해진다. 하룻밤을 새더라도 참 즐겁다. 평생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알려질지도 모르는 나를 찾아와서 예수교, 불교, 유교는 다 다를지 모르나 진리는 하나밖에 없는 것을 얘기하니 이보다 더 좋은 즐거움이 어디 있겠는가.”

 

춘원은 오산학교 교가를 작사했다. 이후 류영모가 수학과 물리화학, 천문학을 맡게 된다. 류영모가 당시 교재로 쓰던 물리교과서는 서울 종로에 있는 출판사 보성관에서 번역한 한자투성이의 책이다. 우선 한자부터 가르쳐야 읽기라도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오산학교의 아침 풍경은 이랬다. 학생들은 새벽 기상종에 맞춰 일어나 열을 지어 구보를 하며 황성산(黃城山) 일대를 한 바퀴 돌았다. 오산동 북쪽에 있는 이 산은 누런 점토로 축조한 토성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학생들은 구령에 맞춰 교가를 제창했다.

 

"뒷뫼의 솔빛은 항상 푸르러/비에나 눈에나 변함 없이/이는 우리 정신 우리 학교로다/사랑하는 학교 우리 학교"

 

이 교가 소리에 맞춰 마을사람들은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이 교가를 지은 사람은 교사 여준이었다. 그는 수신(도덕), 역사, 지리, 산수를 가르치던 선생이다. 열심히 구령을 부르며 구보하는 학생을 이끄는 교사는 서진순이었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육군 연성학교를 나왔기에 학생들의 체조와 훈련을 담당했다. 깐깐한 교사로 스파르타 교육을 했다. 

 

구보를 마친 학생들은 학교 앞을 흐르는 개울에서 소금으로 이를 닦고 얼굴을 씻었다. 이윽고 종이 울리고 학생들은 아침 식사를 했고 공부를 시작했다. 학교 설립자인 이승훈은 여준 선생에게 글도 배웠고, 학생들과 함께 운동장을 쓸고 화장실 청소를 했다. 이승훈에 대해서 오산학교 출신인 함석헌이 지은 시조가 남아 있다.

 

"남강(이승훈의 호)이 무엇인고 성(誠, 정성)이며 열(熱, 열정)이로다 / 강(剛, 굳셈)이며 직(直, 곧음)이러니/의(義, 옳음)시며 신(信, 믿음)이시라/나갈 젠 단(斷, 단호)이시며 그저 겸(謙, 겸손)이시더라/일천년 묵은 동산 가꾸잔 큰 뜻 품고/늙을 줄 모르는 맘 어디 가 머무느냐/황성산 푸른 솔 위에 만고운(萬古韻, 만년의 운치)만 높았네"

 

●오산학교 '톨스토이 신앙' 탄압사건

 

1910년 11월7일 이후 류영모는 레프 톨스토이(Leo Tolstoy, Lev Nikolayevich Tolstoy, 1828~1910, 러시아 대문호, 사상가) 사상에 깊이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무렵 오산학교에서는 '톨스토이 신앙탄압'이라 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1910년 12월 학교설립자 이승훈은 기독교 신자가 된 뒤 평양신학교장이자 선교사인 로버트(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영국의 개신교 선교사.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통해 조선에서 사망한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와 가까워졌다. 그간 교장 역할을 하던 여준이 만주로 떠나자 로버트 선교사에게 교장을 맡긴다. 이듬해 2월엔 이승훈은 안명근 사건으로 감옥에 갔고 로버트가 학교를 관리하게 됐다.

 

로버트는 오산학교를 기독교 장로회 학교로 만들어갔다. 학생들에게 교리문답을 하게하고 교회교리 신앙을 고백하게 했다. 이광수는 이런 방침과 충돌하다 1913년 11월 오산학교를 떠난다. 류영모는 어떻게 됐을까. 1912년쯤 이 학교와 결별했는데, 자세한 이유는 나와 있지 않다. 일제의 탄압을 받는 것만도 고통스러운데 선교사에게 사상 감시를 받는 일을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도그마(dogma, 기독교 교리)로 자유로운 생각을 구속한다면 거기에 진리가 살아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였다. 1912년 오산학교를 떠나면서 그는 교회 교리 신앙도 떠난다. 오산학교에 정통 기독교를 심었던 류영모는 그 정통 기독교의 배척을 받아 자기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그러면 톨스토이는 류영모에게 어떻게 다가온 것일까. 우선 통일복음서 얘기부터 해야 할 것 같다. 톨스토이는 기독교의 4대 복음서를 하나로 요약했다. 이것을 '요약복음서' 혹은 '통일복음서'라 부른다. 그런데 그는 복음서를 요약하면서 교회가 지금껏 중요시해온 것들의 일부를 빼버렸다

 

●성경 내용을 재정리한 '통일복음서'의 충격

 

세례요한의 수태와 출생, 투옥과 죽음을 빼버렸고, 예수의 출생과 가족계보, 이집트(애급) 탈출 부분을 잘라냈고, 가나와 가버나움에서 펼친 그리스도 기적과 악마 축출, 바다 위를 걷는 기적, 무화과나무의 건조, 병자 치료, 죽은 이의 소생을 제외시켰다. 또 예수의 부활과 예수 예언의 성취 같은 부분도 없앴다. 기독교회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힘주어 전파해온 성서의 부분들을 잘라낸 셈이다. 통일복음서 서문에서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했다.

 

"이런 것들은 조금도 교훈을 담고 있지 않다. 경전을 번잡하게 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복음서의 한 구절 한 구절이 다 신성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는 무지한 군중에게 설교했다. 예수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에 대해서 들은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5만종의 기록물 중에서 세 가지를 고르고 한 가지 요한복음을 더 골랐다. 성경 복음이 모두 성령으로 보내진 것이라는 상투적인 견해에 미혹되어선 안 된다.“

 

톨스토이는 교회 교리가 예수의 가르침에 얼마나 어긋나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소년시절 처음 신약성경을 읽었을 때 예수의 가르침에서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랑과 겸손과 자기부정이며 악에 대해 선으로 대하라는 메시지였다. 내겐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이었다. 내 마음이 회의와 절망 속에 있을 때도 그랬다. 그래서 교회에 귀의했다. 그런데 교회가 믿는 신조 속에 나를 감동시킨 기독교 본질이 보이지 않았다.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였던 게 교회에선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교회는 사랑과 겸손과 자기부정의 내적인 진리에서 이탈해 외적인 독단의 신념만을 인정하고 있었다."(톨스토이 '종교론' 중에서)
      
●톨스토이 “교회는 죽었다”

 

톨스토이는 “교회는 죽었다”고 말했다. "예수의 가르침을 택할 것인가, 교회의 가르침을 택할 것인가. 둘 가운데 하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교회 규율들을 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교의에서 이탈하고 싶지 않았지만, 예수의 가르침을 택했을 때 남아 있는 교의가 하나도 없었다."(톨스토이 '나의 신앙의 요체' 중에서)                           

▲ 레프 톨스토이

 

류영모는 톨스토이를 읽으면서 자기의 사상을 정리해 나갔을 것이다. 무엇이 정통신앙인가. 교회를 버렸다는 톨스토이가 비정통인가. 예수의 진정한 정통은 어디에 있는가. 베드로가 구술한 것을 기초로 마르코(마가)가 쓴 마르코복음에는 톨스토이 통일복음서처럼 동정녀 탄생도 없고 예수 육신부활도 원래 없었다(예수 부활은 2세기초 아리스티온이 증보한 것에 들어갔음).


류영모는 토인비와 헤르만 헤세의 글들도 읽었다.

 

"나는 기독교 전통적 신앙이 초보적인 검증에도 합격하지 못하는 수준이란 것을 안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예수의 육신 부활 승천이 특히 그렇다.'(토인비의 '회고록' 중에서)

 

"나는 종교 없이 산 적은 없다. 종교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 교회 없이 살아왔다. 찬란한 가톨릭교회는 가까이 다가가면 유혈폭력과 정치, 비열함의 냄새가 풍긴다."(헤르만 헤세의 '인생론')

 

성령의 생명은 어디 있는가. '정통'이라고 지켜온 저 위경(僞經)의 구절들에 있는가. 기독교 본질에 벗어난 독단의 신념에 있는가. 무엇이 정통인가. 이 깊은 문제의식이 젊은 류영모를 치열하게 이끌었을 것이다.       
            
●나와 톨스토이는 우치무라와 다르다

 

류영모의 말을 대신해준 것은 에드윈 헤치('허버트강연집')였다.

 

"예수의 산상수훈과 사도신경 사이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불과 100년 사이에 다른 종교가 됐다. 정치화하고 세속화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인가 사도신경인가?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후자를 택했다. 사도신경은 교회에서 기도로 가르쳐지며 읽혀지지만 산상수훈은 심지어 교회에서 읽혀지는 복음 구절에서도 제외되고 그래서 전체 복음서가 읽혀지는 날을 제외하고는 교회의 집회에서 신도들은 결코 듣지 못한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말인지, 기독교인들조차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신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산상수훈과 사도신경이 이렇게 택일을 해야 하는 선택지인지, 그것이 지니는 논리적 갈등이나 모순이 무엇인지에 대해 치열하게 석명(釋明)해야 하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감히, 왜 저런 질문을 던져 1800년 기독교 역사를 흔들고 있는 것일까.

 

●예수의 참메시지는 ‘산상수훈’

 

산상수훈은 성경 마태복음 5~7장을 가리키는 성구이다. 산상수훈은 '성경 중의 성경'이라고도 불리며, 예수가 선교활동 초기에 갈릴리의 작은 산(가버나움) 위에서 제자들과 군중에게 행한 설교이다. 이 설교는 예수의 윤리적 가르침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어서 기본적인 기독교 윤리지침으로 꼽힌다. 내용은 '8개의 복(八福)'과 사회적 의무와 자선행위, 기도, 금식, 이웃사랑에 대한 가르침이다. 참된 신앙생활의 내면적 본질이 무엇인지를 간명하게 말하고 있는 대목들이기도 하다.

 

심령이 가난한 이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임이요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순종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의(義)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배부를 것이요 /연민을 지닌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연민을 받을 것이요 /마음이 맑은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느님을 볼 것이요 /평화롭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느님 아들이라는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의 것이다 <'산상수훈' 중에서>

 

'복이 있나니'의 앞에 있는 8가지 조건들은 역설에 가까운 것들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복된 삶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과 '내가 잘되는 것'이 중심이다. 그러나 이 팔복은 모두 남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으며, 공동체나 집단의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말하고 있으며, 자기의 것을 덜어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산상수훈은 팔복을 말한 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세상의 빛"이라고 한다. '세상'이라고 표현된 것은 예수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며, 소금과 빛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역할을 말한다. 소금의 역할은 세상의 부패를 막는 역할과 세상의 맛을 내는 역할이다. 빛의 역할은 어둠의 세상을 밝히는 역할과 모든 존재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역할이다. 현재의 역할과 미래의 역할을 겹친 비유로 말하고 있다. 소금이 그 맛을 잃거나 등불을 등경 위에 두지 않고 말 아래 두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면서, 예수는 소금답고 빛답게 사는 것이 기독교적인 삶이라고 말해준다.

 

●사도신경, 신앙 '이단'의 판단 근거

 

사도신경은 사도(apostle)가 전해준 신경(creed)으로 기독교 공동체가 공식적으로 고백하는 신앙고백과 규범을 가리킨다. 사도는 예수의 제자를 중심으로 한 초대교회의 메시지 전달자들을 말한다. 2세기의 교회에서 정리된 세례의 믿음고백 형식이 3세기 이래로 전해져 사도신경의 기본이 되었다. 4세기에 접어들면서 처음으로 사도신경이란 이름으로 불렸으며, 10세기에 완결된 형태로 서방종교에서 사용된다. 사도신경은 사도가 직접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전승에 기초해서 만들었으므로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사도신경은 이단을 판단하는 기초근거가 된다.

 

사도신경은 이런 형식을 지닌다. (1)나는 전능하신 하느님, 창조주를 믿습니다. (2)나는 그의 유일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며 장례 지낸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느님 오른편에 앉아계시다가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3)나는 성령을 믿습니다. (4)나는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와 교제와 죄를 사함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사도신경은 '내가 지금 여기서 믿는다'는 실존적 신앙을 강조하고 그 믿음이 전승되어온 것임을 강조한다. 이 강조는 이단과의 차이점을 부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단은 예수를 통해 계시해준 하느님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믿음 위에 세운 신앙이라는 논리다. 사도적 전승이 아니라는 점이 이단을 가르는 핵심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이렇게 말한다. "1800년 전 이교도들이 사는 고대 로마세계 한가운데 이상하고도 새로운 가르침이 나타났다. 이 가르침은 예수라는 사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옛 종교의 모든 규칙 대신 오직 내면적 완성과 진리, 그리고 그리스도의 화신인 사랑을 내세웠다. 이 가르침은 그 내면적 완성의 결과, 즉 예언자들이 예언한 외면적 완성인 하느님의 나라를 보여주었다. 이 가르침에는 진리, 교리와 진리의 일치 말고는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이 가르침에는 사람을 변호하여 정당화하고 그를 구원한다는 행위는 없었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산상수훈의 내면적 완성과 사랑만이 본질이었다는 것이다.  

 

●복음서에는 오늘날의 '교회'가 없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실존적 신앙고백의 핵심에는 예수가 말한 '무욕과 사랑'은 전혀 없고 오직 인간과 다른 초인적인 기적에 대한 강력한 신뢰를 재확인하는 내용들만 담겨 있다는 것이 톨스토이의 생각이다. 이런 그의 생각은 '교회'라는 현재의 개념이 비성서적이며 비기독교적이라는 주장으로 나아간다. 복음서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딱 두 차례 나오는데, 단순한 모임을 가리킬 뿐 신앙의 기관이나 시스템을 가리키는 의미는 전혀 없었다. 그런데 가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의 교리문답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톨스토이가 교회를 문제 삼는 더 큰 까닭은 스스로를 무오류로 주장하고 '이단'을 설정하는 개념으로 활용하여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 대한 추구를 억압하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는 교회가 자임했던 '사람과 신의 중재자'는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가 스스로 가르침을 인간 각자에게 알려주러 왔는데 왜 또 다른 중재가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스도의 진실에 다가갈수록 교회가 세워놓은 교리들이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허구임이 밝혀질 수밖에 없다. 교회에 대해 이렇게 놀랄 만한 발언을 쏟아낸 이가 대문호이자 종교사상가인 톨스토이였다. 이 땅에서 톨스토이의 이같은 사상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것을 한국에서 구체적이고 확장적으로 실천하고자 한 사람이 다석 류영모였다.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우다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류영모의 가슴 속에선 동양과 서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 사상의 옥동자가 잉태하고 자라나 꽃을 피웠다. 기독교, 불교, 유교, 노·장 사상 등 동서고금의 종교와 사상을 하나로 꿰어 독창적인 종교 철학의 체계를 세운 종교일원론자(宗敎一元主義者)이자 사상가, 철학자, 교육자. 20세기 한국이 낳은 정신적인 큰 스승이자 진정한 의미의 ‘종교개혁자’로, 땅의 어버이로부터 받은 몸과 맘의 거짓된 제나(ego)를 벗어나 우주의 주재자이자 우주정신이신 한얼님(니르바나님)이 주시는 얼나로 솟나(부활)는 길을 가리켜 보였다.

 

다음은 다석 연구의 최고 권위자 박영호가 엮은 책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얼나로』의 내용 중 일부이다. 

                              

●모든 종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하나’

 

“탐색이 넓어지고 깊어질수록 예수에 대한 나의 이해도 기독교라는 도그마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전개되어지는 것이 분명했다. 예수와 석가가 가리켜 보이는 바가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 두 성인이 서로 만나게 된다면 얼싸안을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는 것, 불교인들에게 사랑의 실천이 불충분하다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수행이 불충분하다는 것 등이 체감되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찾고 또 찾아서 도달해야 할 목표는 동일하다. 자기 안에 이미 내재된 신의 성품(혹은 부처님 성품)을 알아차리고 깨어나는 것. 이 지향점을 가리켜 보이는 것은 비단 기독교와 불교만이 아니다. 유교, 도교, 이슬람교 등도 다 마찬가지다. 종교다원주의라고들 하지만, 사실은 종교일원주의인 것이다. 모든 종교가 가리켜 보이는 것은 ‘하나’인 것이다.“
- 다석 류명모 어록 중에서

 

●하늘아버지, 땅아버지


"눈을 감고 나 자신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상상을 해보면 머리는 물론 온몸이 시원해진다. 이 다섯 자(尺) 몸뚱이를 보면 한심하다. 이에서 박차고 나가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에 달린 게 위로 '솟나'자는 것이다. 믿는다는 것은 진리 되시는 하느님을 향해 머리를 드는 것이다. 머리는 생각한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하느님께 머리를 두는 것이다. 하느님이 내 머리다. 내가 예수를 스승으로 받든 것은 예수가 하느님과 부자유친(父子有親)하여 효도를 다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께 예수만큼 효도를 다한 사람이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부터가 남다르다. 하느님께 기도하면서 가정에서 자녀들이 아버지를 부르듯이 그렇게 친근하게 부른 사람이 예수가 처음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만으로도 예수는 인류에게 큰 공헌을 하였다. 예수처럼 하느님을 우러러 아버지라고 부를 때 몸속의 피가 용솟음치고 기쁨이 샘솟는다. 하느님 아버지를 내가 부른다. 아버지의 얼굴이 이승에는 없지만 부르는 내 마음속에 있다. 십자가 소리보다 아버지 소리를 많이 하라. 언제나 염천호부(念天呼父)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느님 아버지는 화두이며 공안(公案, 석가의 말과 행동)이다. 일요일 어느 곳에 가서 어떤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생각이다. 마음머리, 말머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아버지를 불러야 한다. 이 땅에 아버지를 모시면서 나쁜 짓 하는 아들은 없다. 하느님 아버지를 모시는 효자에 악인은 없다. 유교가 잘못된 것은 하늘의 아버지를 버리고 땅의 아버지만 찾다가 땅의 아버지조차 버리게 된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를 먼저 찾아야 땅의 아버지도 찾게 된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태초요 영원인 한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한얼님이 아버지임을 안잊으면 섬기는 것“   

     
“사람이 우주의 비롯인 맨첨(太初)을 잘 모른다. 우리 사람은 온통(전체)의 지극히 작은 부분이고 지극히 불완전한 존재라 온통(전체)으로 온전(완전)한 한얼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은 온통이요 온전인 한얼님을 그리워한다. 태초요 영원인 한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한얼님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것이 참된 삶이요 행복한 삶이다. 우리가 여기 왜 있나? 이 까닭을 알자면 한얼님 아버지에게 들어가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우리의 머리 위에 한얼님을 이고서 거룩한 생각을 피워야지 다른 생각을 할 것 없다. 한얼님을 뚜렷이 한얼님 아들로 뚜렷할 일이다. 우리 사람의 값어치가 무언가? 몇천 몇만 년이 걸려도 한얼님의 얼로 한얼님과 하나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한얼나라에서 떨어진 한얼님의 아들이란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얼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이것은 한얼님께서 허락하신 거룩한 일이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한얼님을 섬기는 데는 물질이 안 든다. 한얼님이 아버지임을 잊어버리지 않으면 섬기는 것이다. 안 잊어버린다는 것은 생각한다는 것으로 곧 정신의 일이다. 우주이시며 우주의 정신인 한얼님을 내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임을 깨닫는 것은 더없는 기쁨이다. 한얼님을 그리며 생각하면 정신이 위로 오르게 된다. 한얼님을 생각하는 것이 기도요 명상이다. 기도는 내 생각이 한얼님께로 피어 올라가는 것이다. 한얼님의 뜻을 좇아 한얼님 아버지께로 올라간다는 것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다. 인생은 허무한 것이 아니다. 몸삶은 덧없어도 얼삶은 영원하다.” - 다석 류영모 어록 중에서  

 

책 『다석 류영모 어록-제나에서 몸나로』 엮은이 박영호는 함석헌의 글에 감명을 받고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어 오던 중에 함석헌의 스승인 류영모의 강의를 듣고 바로 그 길로 제자가 되었다. 1965년 “스스로 독립하라”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5년간 혼자 공부한 끝에 첫 책 『새 시대의 신앙』을 출간했으며, 팔순이 되신 다석 선생으로부터 “졸업증서? 마침보람”이라고 쓰인 봉함엽서를 받았다. 다석 사상을 통해 얼나로 솟나는 길을 가리켜 보이는 그의 저서로는 『다석 전기』, 『노자와 다석』, 『다석 중용 강의』, 『다석 씨알 강의』, , 『공자가 사랑한 하느님』, 『잃어버린 예수: 다석 사상으로 읽는 요한복음』, 『메타노에오, 신화를 벗은 예수: 다석 사상으로 풀이한 도마복음』 등이 있다.
    
류영모의 '지금·여기·나' 철학

 

류영모가 최남선을 알게 된 것은 '소년' 잡지 편집을 돕던 이광수가 어느 날 최남선과 함께 자신의 집에 찾아오면서였다. 함께 오산학교 교사를 3년 지낸 이광수는 류영모를 잘 알고 있었다. 1914년 7월 최남선이 잡지 '청춘'을 창간할 무렵이었다.

 

류영모는 그 다음호인 8월호에 글을 싣는다. '청춘'에 처음 기고한 글은 '나의 1234'(1914년 8월1일 청춘 2호)였다. 이후 꾸준히 글을 실었다. '활발(活潑)'(청춘 6호), '농우(農牛)'(청춘 7호), '오늘'(1918년 6월 청춘 14호), '무한대(無限大)'(청춘 15호) 등이다. '활발'이란 글은 당시 중학교 교과서인 『조선어독본(朝鮮語讀本)』에 전재되었다. '청춘'에 이어 나온 주간지 '동명(東明)'에 '남강 이승훈전'을 싣기도 했다.

 

다음은 당시 실린 류영모의 글들 중 하나인 '오늘'이란 글이다. 28세 때의 생각으로 믿기지 않는다. "지금 여기 나를 살아라"는 힘있는 충고이다.
                   
●“오늘을 똑바로 살아라”

 

"나의 삶으로 산다는 궁극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가로대 오늘 살이에 있다 하노라. 오늘 여기 '나'라 하는 것은 동출이이명(同出而異名, 함께 났으나 이름이 다른 것)이라 하지 않으면 삼위일체(三位一體)라 할 것이니 '오늘'이라 할 때엔 여기 내가 있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라 하는 곳이면 오늘 내가 사는 것이 분명하고 '나'라 하면 오늘 여기서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 하는 뜻이로다. 무수지점(無數地點)에 광겁시간(曠劫時間)에 억조인생(億兆人生)이 살더라도 삶의 실상은 오늘 여기 나에서 볼 뿐이다. 어제라 내일이라 하지만 어제란 오늘의 시호(諡號)요, 내일이란 오늘의 예명(豫名)일 뿐이다. 거기라 저기라 하지만 거기란 거기, 사람의 여기요. 저기란 저기 , 사람의 여기가 될 뿐이다. 산 사람은 다 나를 가졌고 사는 곳은 여기가 되고 살 때는 오늘이다. 오늘 오늘 산 오늘 오늘 어제의 나, 거기의 나는 죽은 나가 아니면 남된 나, 나 여기 사는 나를 낳아놓은 부모라고는 하겠으리. 현실아(現實我)는 아니니라. 내일을 생각하려거든 어떻게 하면 내일의 위함이 되도록 오늘을 진선(盡善)하게 삼가는 맘으로나 할 것이요. 너무 내일만 허망(虛望)하다가 오늘을 무료히 보내게 되면 이것은 나지도 않은 용마를 꿈꾸다가 집에 있는 망아지까지 먹이지 않는 격이라. 산 것은 사는 때에 살 것이니라.“
-잡지 ‘청춘’에 실린  다석의 기고문 중에서

 

종교는 저마다 "사랑하라"고 외치는데···

 

수많은 종교들의 메시지를 딱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뭘까. 강조하는 방식이나 수식어가 다를 수 있지만 핵심은 "사랑하라"이다. 사랑한다는 일은 자기의 에고(ego)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자신이 아닌 존재에 대해 마음을 쓰고 헌신하고 배려하는 일이다. 자기의 삶을 살아가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인간에게 타자를 향한 사랑은 일종의 '기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신과 이웃과 이성과 모든 존재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무아(無我, 자기를 초월함)'의 경지를 갖는 것이 이상적 신앙의 원형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적 폐단인 양극화는 많은 이들에게 삶의 조건들을 더욱 버겁게 만들었고 희망의 싹을 잘라버렸다. 거기에 디지털 문명의 급진전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 변동은 기존 삶의 질서들을 심각하게 흔들어놓고 있다. 이같은 시대야말로 신앙적 가치 회복이 절실하지만, 종교는 스스로 세상의 가치에 매몰된 듯 맹렬한 욕망의 대열에 줄을 선 듯하다.

 

이런 사회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어리석어 보이거나 공허하게 느껴진다. 남녀 간의 사랑조차도 그 원관념을 잃고, 오직 욕망의 거래나 득실의 저울질로 뒤바뀌어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시대에, 결혼은 더욱 '의문시되는' 행위가 되어간다. 남자와 여자가 모두 사회생활을 하고 개별적인 소득을 내는 시대에, 서로 삶을 합치는 일의 의미는 무엇일까. ‘소득의 합산’을 통해 삶의 수준을 높이는 장점만을 높이 살 뿐이다. TV드라마가 날마다 보여주듯 권력과 금력의 네트워크를 만드는 거미줄일 뿐이다. 거기에 사랑은 한가한 '장식품'이 되어 있다. 이것이 행복하거나 의미 있는 삶의 구현인가. 종교가 내놓는 '사랑'이 전혀 실현되지 않은 채, 생활의 방편을 얻기 위해 하는 결혼식들. 그리고 그런 것에 환멸을 느껴 비혼(非婚)을 택하는 이 시대의 청춘들에게 종교와 사상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남녀는 성별(聖別)을 해야 결속이 깊어”

 

"연애를 옛날에는 상사(相思)라 하였어요. 서로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연애가 장사처럼 여겨집니다. 별 타산(打算)이 다 꿈틀거립니다. 이 세상에 당신밖에 없다, 당신의 종이 되어도 좋다, 당신 아니면 나는 죽는다는 것은 다 흥정을 하느라 그런 것입니다. 남녀가 교제를 황망히 해선 안 됩니다. 성별(性別, 남녀간의 구별)이 뚜렷해야 상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별(聖別, 성스러운 거리)이라 합니다. 성별을 해야 구속(救贖, 죄를 대신해 구해줌)이 옵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시간적으로 여유를 두고 공간적으로 멀리하여, 서로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간격을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급하게 사귀는 것은 경솔입니다. 좋다고 달려가고 곱게 보인다고 곧바로 가까이 하면 상사의 마음이 굳세지 못합니다."
-류영모의 연애론 

 

종교에서도 진정한 통섭 이뤄지고 있어       


20세기를 관통하며 살다 간 류영모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은 불교인인가? 오케이. 당신은 그리스도인인가? 오케이. 그러나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거나 그리스도인이기만 하다면, 당신은 아직 세상의 반쪽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마젤란이나 마르코 폴로가 세계일주 항해를 함으로써 비로소 세계지도가 완성되었지만, 당신이 만약 불교인이나 그리스도인에만 머문다면, 당신은 아직 정신적인 세계일주를 하지 못한 채 동양인이나 서양인으로만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3차원 위성지도(내비게이션)를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는데도 평면 지도책만을 고집하는 것과도 같지 않을까.

 

서양과 동양이, 불교와 기독교가 만난 이후, 지구촌이 명실공히 하나가 되면서, 종교 간의 활발한 교류를 넘어서서 이제는 종교에서도 진정한 통섭(統攝)이 이루어지고 있다. 기독교든 불교든 동일한 달을 가리켜 보이는 손가락들이라는 것에 점점 더 많은 이들이 공감대를 형성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3차원적 세상에서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어 보편화되었듯이, 정신계에서도 마음이 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는 내비게이션이 발명되었다. 아직은 그것을 활용하는 이가 적을 뿐. 기독교와 불교가 만나서 손잡고 만들어낸 정신의 내비게이션, 그것을 사용하게 된 자의 자유와 풍요로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인에게 주어진 특혜가 아닐까.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기사입력 : 2020-03-12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뒤로가기 홈으로

가장 많이 읽은 기사

URL 복사
x

PC버전

Copyright ⓒ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