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산 스님 “시대가 어려울 때 이를 선도하는 불교가 있었다”

크게작게

문윤홍 대기자 2020-07-30

원각사 주지 반산스님, 청량국사의 화엄경 해석 화엄경청량소34권 번역 출간    

 

신라와 고려는 불교를 국교(國敎)로 숭상했다. 원광법사와 자장, 원효, 의상대사의 지도아래 신라는 세속오계 정신을 화랑도 수련에 도입해 삼국통일의 큰 역할을 하게 했다. 고려는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訓要十條)에 힘입어 불교 법회가 활성화되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국가 주관행사로 봉행했다. 의종 24(1170) 정중부, 이의방 등이 주도하는 무신정권이 출현해 불교는 몰락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최충헌을 비롯한 최씨 무신정권은 대몽항쟁(對蒙抗爭)과 팔만대장경 판각을 통해 고려를 지켜냈다. 백성은 수많은 고초를 겪어 민생은 피폐해졌지만 당시 세계 최강 원()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다.

 

조선왕조는 고려 후기 타락한 불교를 배척하는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펴 불교는 많은 고초를 겪게 된다. 그러나 명종 때 보우대사와 문정왕후가 스님 과거시험인 승과(僧科)제도를 부활시켜 서산, 사명대사를 중용했다. 이들은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이끌며 활약했고 일본에 잡혀간 포로 500명을 데려오는 등 호국불교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숙종 15(1689) 어느 날 전라도 신안 앞바다 임자도에 중국에서 출발한 큰 상선이 난파해 좌초하자 사람들이 이 배에 실린 재물은 가져가고 불경(佛經)만 남았다. 이 소식을 들은 백암 성총(柏巖 性聰·1631~1700) 스님과 그 제자들이 달려가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80권을 찾아냈다. 이들은 이후 전국을 돌며 탁발해 판각불사(板刻佛事)를 이뤄 목판 화엄경소초를 만들었다. 현재 서울 봉은사 판전에 모신 그것이다.

 

이 불사는 조선 불교가 산중에서 소원성취 및 생일 불공과 천도재를 올리거나 각종 부역을 하며 명맥만 유지하던 데서 벗어나 화엄경의 원융화합(圓融和合) 사상을 사회에 전하는 큰 계기가 됐다.

 

조선시대 선지식 환성 지안(喚醒 志安·1664~1729)과 호암 체정(虎巖 體淨·1687~1748), 설파 상언(雪坡 尙彦·1707~1791), 연담 유일(蓮潭 有一· 1720~1799), 인악 의첨(仁岳 義沾·1746~1796) 등은 화엄경의 대가로 손꼽힌다. 이들 모두 백암 화상의 화엄경소초 판각불사이후 두각을 나타냈다. 판각불사 이후 화엄경 연구 붐이 조성됐고 전국적으로 화엄대회 강회 등 화엄경대법회가 열렸다.

 

화엄경을 주제로 법문을 설하는 화엄대회는 당시 신분사회였음에도 법회 참석에 빈부귀천, 남녀노소 제한을 두지 않는 무차(無遮)대법회로 열렸고 모든 참석자 그릇에 음식을 가득 담아주는 만발공양(滿鉢供養)을 펼쳤다. 대둔사의 청련 원철(靑蓮 圓徹)1607년 화엄대회를 최초로 열었다. 이어 풍담(楓潭)의 대둔사 대회, 1691년 백암의 선암사 창파각(滄波閣) 화엄대회, 호암(虎巖)의 대둔사 정진당(精進堂) 대화엄강회, 1760년 연담의 대둔사 대회와 1768년 미황사 대회 등이 이어졌다. 또한 1719년 무용(無用), 1750년 영해(影海)의 송광사 화엄대회 등 140여 년간 화엄의 대가 20여 명이 전국에서 전통을 이은 것이다.

 

판각불사로 최상승 화엄불교가 주류를 이루게 돼 불교는 산중불교에서 탈피해 일대 변혁을 가져올 수 있었다. 조선불교가 다시 살아나 백성도 부처님의 자비구제를 경험할 수 있게 됐다. 한 시대를 선도하는 불교의 힘이 삼국통일과 국가수호의 든든한 상징이 되고, 백성이 삶의 고단함을 이겨내는 버팀목 역할을 한 것이다.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대몽항쟁이나 조선 임진왜란 때의 승병 활약은 불교가 호국불교로서 훌륭한 역할을 다한 것이다.

 

반산 스님 “23년간 화엄경의 모든 것 한글로 옮겨 고승과 대화 끝내  

 

청량 징관(淸凉 澄觀·738839)은 중국 당나라 시대에 선교(禪敎)를 겸비한 고승이었다. 그의 화엄경수소연의초(華嚴經隨疏演義鈔)는 화엄경 해석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공부하는 스님이라면 한 번 오르고 싶은 산이다. 23년 동안 첩첩산중에서 도전해 고승과의 대화를 끝낸 학승(學僧)은 경남 양산 원각사 주지 반산(盤山·61) 스님이다. 청량 국사의 해석을 우리말로 최초로 번역해 화엄경청량소(華嚴經淸凉疏)·(이하 청량소·담앤북스) 34권으로 최근 완간됐다.

 

완간 소감으로 반산 스님은 정상을 못 보면 그곳은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는다. 이제 산에 올라 아래를 굽어볼 수 있다는 느낌이다. 화엄경 일부와 전체를 보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번역 불사는 어떻게 시작했을까.

반산 스님은 출가 직후 가끔 청량소를 접했지만 제대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1997년 원문을 전산 입력하기 시작하면서 이번 생()에 완역하자는 뜻을 세웠다고 했다.

 

청량 국사는 어떤 고승이었을까. 그는 “7세에 출가한 국사는 100세 이상 장수하며 화엄종의 꽃을 피운 분이다. 국사가 청량소 집필을 결심했을 때 이미 큰스님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교 교리만으로 집필이 어렵다고 여겨 세속으로 나가 노장(노자와 장자)사상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을 익힌 뒤 책을 쓰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번역 과정에 가장 큰 어려움은 무엇이었을까.

스님은 무엇보다 화엄경의 방대함이다. 화엄경이 80, ()을 해석한 소()60, 다시 소를 풀이한 초()90권에 달한다. 컴퓨터 작업을 오래 하다 보니 망막에 혈흔이 생기고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은 비문증(飛蚊症)까지 생겼다. 최초의 한글 번역이라 참고할 자료가 부족했다는 것도 어려움을 더했다고 토로했다.

▲ 23년간 작업한 끝에 『화엄경청량소』 34권을 완간한 경남 양산 원각사 주지 반산 스님.  

 

그러면 화엄경의 매력은 무엇일까.

반산 스님은 모든 것을 편안하게 하는 화합의 이치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경전부터 조사 어록까지 담아낸 백과사전으로서 화엄경으로 공부하고 수행하면 불교가 가깝고 쉬워진다고 말했다.

 

스님의 예사롭지 않은 법명(法名)은 어떻게 된 것일까. 반산 스님의 원래 법명은 춘우(春雨)였다. 한국 불교의 고승으로 꼽히는 경봉 스님(18921982)봄에 출가했으니 봄비처럼 만물을 성장하게 하라며 지어준 것이다. 하지만 어감이 부담스럽고, 봉암사 수좌였던 적명 스님은 봄비? 법명으로는 힘이 없어 파이라고 했다. 10년 정도 쓰다 은사인 명정 스님에게 다시 받은 법명이 반산이다. 법명을 받고 돌아서는데 온산 아니라 반()산이라 미안하다며 껄껄 웃었다고 한다. 그의 은사인 명정 스님은 2019년 입적했다.

 

고승 경봉 스님에 대해서 스님은 경봉 스님은 은사의 은사이니 할아버지뻘이 된다. 경봉 스님이 1927년 시작한 화엄산림법회는 화엄경을 전하면서 생활이 어려운 이들을 모아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자비의 자리였다. 경봉 스님 법문을 들으면 어제 출가한 사람조차 불교를 다 아는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쉽게 법문했다고 말했다.

 

요즘 스님들의 공부 분위기는 어떨까.

반산 스님은 잔소리처럼 들리겠지만 스님들 공부하기 싫어한다. 어렵게 공부해야 쉽게 법문하는데. 상대방 귀에 무언가를 넣어주려면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번 생에 이것 하나 완성하면 후회는 없으리라는 다짐이 큰 힘이 됐다앞으로 화엄경을 어렵지 않게 3권 정도로 만들어 지혜를 알기 쉽게 전하고 싶다고 했다.

 

반산 스님이 화엄경 구절 중 가장 좋아하는 대목은 무엇일까.

그는 모든 것은 마음 하기에 달려 있다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 관련한 대목이다. 화가의 비유가 있다. ‘심여공화사 능화제세간(心如工畵師 能畵諸世間)’,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 능히 세상사를 다 그려낸다고 했다.

 

저자 청량징관  

청량 국사는 중국의 성당(盛唐) 시절 화엄종을 발전시킨 대종장으로 본래 회계(會稽) 사람으로 성은 하후씨(夏候氏)요 자는 대휴(大休)이며 청량은 덕종이 내린 법호이다.

 

7세에 출가하여 우두혜충(牛頭惠忠, 683-769), 경산도흠(徑山道欽, 714-792)에 의지해 선을 깨닫고 현수법장(賢首法藏, 643-712)으로부터 화엄의 법을 이었다. 770년경 오대산(五臺山) 대화엄사(大華嚴寺)에서 화엄경소저술을 결심하고 다시 세간의 학문을 배워 육예(六藝), 도사(圖史)와 구류이학(九流異學)과 축경범자(竺經梵字)와 사위오명(四圍五明)에 이르기까지 널리 열람하더니 건중(建中) 4(783)에 집필에 들어가기 앞서 서응(瑞應)을 구하니 어느 날 꿈에 부처님 얼굴이 산마루에 비치어 그 광명이 천지에 온화하였다. 국사가 손으로 받들어 입으로 삼켰는데 이로부터 한 번 붓을 내림에 막힘없이 4년 만에 화엄경소60권을 완성하였다. 이어서 후학을 위하여 수소연의초(隨疏演義鈔)40권을 지었다고 한다.(緣起 참조)

 

역자 석반산

경남 양산 통도사로 출가하여 고원명정(古園明正) 화상을 은사로 득도하고, 1984년 해인사 강원을 졸업했다. 천은사, 불국사, 대승사, 극락암 선원 등 6하안거를 성만했다. 중앙승가대학, 조계종립 은해사승가대학원 1기로 졸업(1999)했고 쌍계사, 통도사, 해인사 강사를 역임했다. 봉선사 능엄학림 학감, 조계종 행자교육원 교수사를 역임했다.

 

봉선사 조실 월운강백에게 전강(2002)했고 쌍계사승가대학 강주를 역임했다. 현재 경남 양산 원각사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번역 및 편저서로는 화엄경청량소1권 세주묘엄품, 화엄경청량소7, 8, 9권 십지품,재미있는 금강경 강의, 재미있는 화엄경, 재미있는 법화경등이 있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기사입력 : 2020-07-30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band naver URL복사
뒤로가기 홈으로

가장 많이 읽은 기사

URL 복사
x

PC버전

Copyright ⓒ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