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선종사상을 엿볼 수 있는 일수 스님의『달마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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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윤홍 대기자 2021-01-20

달마의 순수한 가르침과 선방 수좌의 체험이 녹아 있어일수(一守) 스님 옮김 

  

한국불교의 대표적 수행법인 참선(參禪)’의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보리달마(Bodhidharma·菩提達摩: ?~495, ?~528: 중국 선종禪宗의 초조初祖)이다.

 

경전에 의지해 깨달음을 구했던 다른 불교 종파들과 달리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며 마음을 들여다보는 수행을 강조한 보리달마의 가르침은 중국 불교에 선종(禪宗:선불교)’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어냈다. 달마의 법문을 엮은 기록인 신간 달마어록(불광미디어 펴냄, 일수 옮김)은 달마의 법문을 기록한 네 가지 문헌 이입사행론’ ‘혈맥론’ ‘관심론’ ‘오성론을 한 권으로 엮어 정리했다. 특히 원문과 그에 대한 번역만으로 이루어져 있어 어떤 군더더기 없이 어록 속 가르침에만 집중할 수 있다.

▲ 조선시대 화가 김명국이 그린 ‘달마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중국의 불교 선승들과 관련해 보리달마만큼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는 인물도 드물다. 당대의 권력자였던 양 무제 소연(梁武帝 蕭衍, 464~549: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의 질문에 거침없이 대답해 노여움을 산 이야기라든가, 갈대를 꺾어 타고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소림사(少林寺)에 머물며 9년간 면벽 수행을 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또 독살당한 이후 다시 살아나 신발 한 짝을 지팡이에 꿰고 길을 떠났다는 설화 등 보리달마에 대해 진위(眞僞) 여부와 생몰(生沒)연대까지도 정설이 없다는 게 일반적이다. 이처럼 보리달마를 통해 일어난 선종사상의 발전과 함께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난 송대(宋代) 이전, 선종 초기 사상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책이 달마어록의 큰 특징이다

 

선방 수좌의 군더더기 없는 직역으로 원전의 맛 오롯이 살린달마어록

 

보리달마는 경전에 의지하여 깨달음을 추구하면서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며 마음을 들여다보는 수행을 강조하는 선종(선불교)’이라는 혁신적인 종파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중국 선종의 초조(初祖)로 일컬어진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진한 눈썹에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인물을 표현한 달마도로 익숙하다. 여러 종류의 달마도를 보면 그린 사람에 따라 배치나 세세한 표현은 다르지만 딱 하나, 시대나 국가를 불문하고 반드시 그려내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부리부리한 눈이다. 여기에는 이야기가 하나 얽혀 있다. 수행을 하던 중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눈꺼풀이 자꾸 내려앉자 눈꺼풀을 아예 잘라버렸다는 것이다. (달마가 잘라버린 눈꺼풀은 차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차를 마시면 잠이 깬다고들 한다.)

 

그밖에도 보리달마에게는 신이(神異)한 행적을 보여주는 전설적인 일화가 여러 편 전해진다. 양 무제의 물음에 너무 거침없이 대답하여 황제의 노여움을 샀고, 이를 피하기 위해 갈대를 타고 양쯔강을 건넜다는 설, 소림사에 머물며 9년간 면벽 수행을 했다는 설, 살해 당했으나 다시 살아나서 신발 한 짝을 지팡이에 꿰고 떠났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이러한 설들은 현대인이 사실로 믿기에는 허무맹랑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설들의 사실 여부를 가려내기에는 현재의 우리에게 전해지는 증거물이 없다. 정확한 생몰연대는 물론, 실제 행적을 알 수 있을 만한 당대의 기록도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달마가 무엇을 강조하고 어떤 가르침을 전했는지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 갈대 한 잎을 타고 강을 건너는 보리달마  

 

벽암록이나 종용록, 전등록, 무문관과 같은, 여러 조사(祖師)들의 화두(話頭)를 선별하여 엮은 선어록이 출현한 것은 송나라 때로, 보리달마가 입적하고도 4~5세기가 지난 이후였다. 하나의 법맥(法脈)으로 이어져 오던 선종이 남종선(南宗禪)과 북종선(北宗禪)으로 나뉜 것을 넘어 일곱 종파로까지 나뉘어 있었던 때이다. 그러다 보니 깨달음을 바라보는 시각이나 수행에 대한 관점 등이 선종 초기와는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달마어록은 성립 시기가 그 이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선 사상의 발전과 함께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나기 전, 초기 선종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와 더불어 달마어록에 등장하는 보리달마는 곧 초기 선종의 이상을 인격화한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만치 않은 수행 이력을 지닌 옮긴이 일수 스님   

 

신간 달마어록에서는 보리달마의 법문을 기록하였다고 하는 이입사행론’ ‘혈맥론’ ‘관심론’ ‘오성론이라는 네 가지 문헌을 소개하고 있는데 때로는 제자와 주고받은 문답으로, 때로는 제자에게 하는 설법으로 달마는 마음이 만법의 근원이며, 마음을 깨우치지 않고서는 결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은 출가 이후 선방에서 64안거를 보내며 철저히 수행에만 몰두해온 선승(禪僧)인 일수(一守) 스님이 자의적(恣意的) 해석 없이 오직 정확한 번역으로만 전하고 있다. 바로 들어가 깨우치는 선의 진수(眞髓)를 문자로 전하기 위함이다. 달마의 순수한 가르침과 선방 수좌의 체험이 녹아 있는 이 책으로, 선종 초기의 사상과 함께 오늘날 선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다

▲ 『달마어록』 옮긴이 일수 스님

  

달마어록을 옮긴 일수 스님은 결코 만만치 않은 수행 이력을 지녔다. 백양사 운문선원 선원장과 유나를 지냈고, 현재 백양사에서 수행 정진하고 있는 수좌이기도 하다.

 

일수 스님은 선방에서 안거를 할 때에는 대중과 함께 수행 정진을 했지만 해제 이후 홀로 지낼 때에는 달마어록을 읽고 그 뜻을 되새기며 수행이 침체되거나 해이해지지 않도록 다잡았다고 한다. 일수 스님이 여러 선어록 가운데에서도 달마어록을 꼽아 번역한 까닭이다.

 

선어록을 놓지 않았던 스님의 수행 경험은 재가불자들을 지도하는 데도 이어졌다. 평소 일상생활 속 선 수행을 강조해온 스님은 재가불자들의 참선 수행을 지도하기도 했는데, 이때 실참을 하기 전 선어록 강의를 먼저 한 이후에 참선으로 이어지도록 지도했다. 달마어록을 강의할 때 재가불자들과 함께 한 구절씩 읽고 번역하며 공부했다.

 

이 책에는 그러한 일수 스님의 수행과 대중과 함께 한 강의 경험이 그대로 녹아 있다. 대중과 함께 공부한 내용을 묶어 정리한 뒤, 탁마(琢磨)하고 교정하는 과정을 수차례 진행하면서 원고를 다듬었다. 해설은 덧붙이지 않고 원전의 내용에만 집중, 직역하고 있어 독자 스스로가 원전의 맛을 오롯이 느끼고 공부할 수 있다.

 

일수 스님은 23세 때 우연히 만난 스님을 따라 대흥사로 출가했다. 본사는 백양사, 은사 스님은 학봉 지선 스님. 1983년 해인사 강원과 1984년 해인사 율원을 졸업했다. 해인사 선원에서 첫 안거를 시작한 후 통도사, 불국사, 봉암사, 백양사, 수도암, 칠불사 등 제방 선원에서 64안거를 성만했다. 백양사 운문선원 선원장 및 유나, 서울 성북동 법천사 운문선원 선원장, 조계사 자율선원 선원장을 역임했다. 현재 백양사 수좌로 수행 정진하고 있다  

 

책속으로  

 

달마어록은 역사상 실존 인물로서의 달마 자신이 쓴 것도 아니고, 그의 설법을 전승해 주는 것도 아니다. 그 내용은 모두 달마를 조사(祖師)로 받드는 초기 선종 사람들의 여러 가지 주장을 모은 것으로, 중국 선의 이상을 인격화한 것이며 역사적인 다른 인물들의 일반적인 선어록과는 상당히 성격을 달리한다. 유의해야 할 것은 공안으로서 달마의 전기가 훗날 선사상의 발전과 더불어 여러 가지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비해, 그의 주장을 전해 주는 어록은 모두 당나라 초기부터 중기 사이에 성립되었고, 그 이후에는 아예 잊히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 p.23, 해제: 중국 선종의 성립

  

若夫入道多途要而言之하면 不出二種이니 是理入이요 是行入이니라.대체로 도에 들어가는 데는 길이 많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두 가지 종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이치로써 들어가는 것이요. 둘째는 수행으로써 들어가는 것이다.- p.35~36 

 

問曰 何名爲法이닛고. 答曰 心如法不生하며 心如法不滅故名爲法이니라.어떤 사람이 질문했다. “어떤 것이 법입니까?”달마 스님이 대답했다. “마음은 법과 같아서 생겨나지 않으며 마음은 법과 같아서 없어지지도 않기 때문에 법이라고 말한다. - p.70

 

心不住色하며 不住非色하며 心不住住하며 亦不住不住心若有所住하면 卽不免繩索이요.마음은 색에 머물지 않고, 색이 아닌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은 머무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또한 머물지 않는 것에도 머물지 않는다. 마음이 머무는 바가 있으면, 얽매임을 면하지 못한다.心若有所作處하면 卽是被縛이요. 心若重法하면 法留得?니라. 心若尊一箇法하면 心必有所卑니라.마음이 만약 짓는 처소가 있으면 이것이 곧 얽매이는 것이요. 마음이 중시하는 법이 있으면 법이 너를 잡아가둔다. 마음이 한 개의 법을 존엄히 여기면 마음은 반드시 천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 p.93~94

 

佛心不可以有心으로 法身不可以像으로 이니 齊知之所解者是妄想分別이며 ?作種種解者皆是自心計校自心妄想이니라.부처님의 마음은 마음[有心]으로써 알 수 없으며 법신은 형상으로써 볼 수 없다. 알음알이로 이해한 것은 모두 망상분별이다. 너의 마음을 따라서 갖가지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자심으로 헤아리는 것이며 이러한 갖가지 자기 마음의 망상이다. -- p.163

 

從無始曠大劫以來乃至施爲運動하는 一切時中一切處所皆是汝本心이며 皆是汝本佛이니 ?心是佛亦復如是하니라.비롯함이 없는 광대한 겁, 그 후로부터 베풀고 움직이는 데 이르기까지 일체의 시간과 일체의 장소가 모두 그대의 본심이며, 이 모두가 그대의 본래불이니라.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 p.207

 

若識得施爲運動靈覺之性하면 ?諸佛心이니라.만일 베풀고 움직이며 신령스럽게 깨닫는 성품을 알면 네가 곧 모든 부처님의 마음이니라.前佛後佛只言傳心이요. 更無別法이니 若識此心하면 凡間一字不識亦是佛이니라.앞 부처와 뒤 부처가 단지 마음 전하는 것을 말함이요, 다시 별다른 법은 없으니 만약 이 법을 알면 범부가 한 자를 알지 못해도 또한 부처이니라. -- p.277

 

佛性者覺也. 但能自覺하야 覺智明了하야 離其所覆則名解脫이라.불성(佛生)이란 깨달음이다. 다만 스스로 깨달아서 깨달음의 지혜가 분명하여 무명에 의해 덮여 있던 것을 벗겨 내면 이것이 곧 해탈이다.故知一切諸善以覺으로 爲根이니그러므로 일체의 모든 선법은 깨달음으로 근본을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因其覺根하야 遂能顯現諸功德樹하며 涅槃之果由此而成하나니 如是觀心可名爲了니라.그 깨달음이라는 뿌리로 인하여 모든 공덕의 나무가 자라나서 열반이라는 열매가 이렇게 이루어지나니 이 같은 마음을 관하는 것이 (마음을) 가히 아는 것[了達]이라고 말할 수 있다.” --p.300~301

 

我本求心心自持 求心不得待心知내가 본래 마음을 구하였으나 마음은 그냥 그 자리에 있더라.마음을 구함에 마음을 기다려 알려고 하지 말라.佛性不從心外得 心生便是罪生時불성은 마음 밖에서 따로 얻을 수 없음이니,마음이 일어나는 즉시 죄가 일어나는 때이니라.我本求心不求佛 了知三界空無物내가 본래 마음을 구하고자 함이지 부처를 구한 것은 아니니,삼계가 공하여 한 물건도 없는 줄을 알지니라.若欲求佛但求心 只這心心心是佛부처를 구하고자 한다면 다만 마음만을 구할지니,단지 이 마음, 마음 하는 마음이 부처이니라.--p. 407~409

 

달마대사의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

若夫入道多途要而言之不出二種一是理入二是行入

무릇 도에 들어감(入道)에는 여러 길이 있지만 요점만 말하면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첫째는 이치로 들어감(理入)이요, 둘째는 수행으로 들어감(行入)이다.

理入者謂藉教悟宗深信含生同一真性俱為客塵妄想所覆不能顯了若也捨妄歸真凝住壁觀無自無他凡聖等一堅住不移更不隨於文教此即與理冥符無有分別寂然無為名之理入

이치로 들어간다는 것(理入)은 소위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근본()을 깨닫는 것이다. “일체중생이 동일한 참성품(眞性. 佛性)을 가졌으나 객진번뇌와 망상에 덮여서 (참성품이) 나타나지 못할 뿐이다는 가르침을 깊이 믿는 것이다. 망상을 버리고 참성품으로 돌아가려면 벽관(壁觀)에 고요히 머물러서 자기도 없고(無自) 남도 없으며(無他) 범부와 성인이 한 가지로 평등하다(凡聖等一).”라고 관찰하여 여기에 굳게 머물러서 마음을 옮기지 말아야 한다. 다시 글로 된 교리(文敎)를 따르지 않으면 곧 바른 이치와 암암리에 부합하는 것(與理冥符)이니 아무런 분별도 없고 고요하여 함이 없다(無爲). 이것을 이름하여 이치로 들어간다고 말한다.

行入者謂四行其餘諸行悉入此中何等四耶一報冤行二隨緣行三無所求行四稱法行

수행으로 들어간다는 것(行入)은 소위 네 가지 수행(四行)이니 기타 나머지의 모든 수행은 다 이 가운데 들어있다. 무엇이 네 가지 수행인가? 첫째는 원한을 갚는 수행(報冤行)이요, 둘째는 인연에 따르는 수행(隨緣行)이요, 셋째는 구하는 것이 없는 수행(無所求行)이요, 넷째는 법에 따르는 수행(稱法行)이다.

云何報冤行謂修道行人若受苦時當自念言我從往昔無數劫中棄本從末流浪諸有多起冤憎違害無限今雖無犯是皆宿殃惡業果熟非天非人所能見與甘心忍受都無冤訴經云逢苦不憂何以故識達故此心生時與理相應體冤進道故說言報冤行

무엇이 원한을 갚는 수행(報冤行)인가. 소위 도를 닦는 수행자가 고통을 받을 때는 마땅히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과거의 무수겁 가운데 근본(. 마음)을 버리고 지말(. 육진경계)을 쫓아 모든 육도의 생명을 받아 유랑하면서 수많은 원한과 증오를 일으켜 위해를 끼치기를 한량없이 해왔다. 지금은 비록 이런 악을 범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모두 전생에 지은 악업의 과보가 익은 것이니 천신이 준 것도 아니고 사람이 준 것도 아니다. 이 고통을 달게 감수하여 원망하거나 다투지 않을 것이다.” 경전에 말씀하셨다. “고통을 만나서 근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마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이 생겨날 때 바른 이치와 상응하여 원한을 녹이고 도에 나아가기 때문에 보원행(報冤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二隨緣行者眾生無我並緣業所轉苦樂齊受皆從緣生若得勝報榮譽等事是我過去宿因所感今方得之緣盡還無何喜之有得失從緣心無增減喜風不動冥順於道是故說言隨緣行也

둘째 인연에 따르는 수행(隨緣行)이라는 것은 중생이 가 없으며 또한 업을 인연하여 굴러서 고락(苦樂)을 받는 것이 모두가 다 연()에 따라 생긴 것이다. 만약 훌륭한 과보로서 영광과 명예 등의 일을 얻을 때는 이것은 나의 과거 전생의 숙업으로 인하여 지금 얻은 것이다. ()이 다하면 다시 없어진다. 그런데 어떻게 기뻐할 것인가?”하고 생각한다. 얻고 잃음을 모두 연()에 따라 맡겨서 마음으로는 늘어남과 줄어듬이 없어서 기쁨의 바람(喜風)에 움직이지 않고 잠잠히 도()에 따른다. 그러므로 수연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三無所求行者世人長迷處處貪著名之為求智者悟真理將俗反安心無為形隨運轉萬有斯空無所願樂功德黑暗常相隨逐三界久居猶如火宅有身皆苦誰得而安了達此處故捨諸有息想無求經云有求皆苦無求乃樂判知無求真為道行故言無所求行也

셋째 구하는 것이 없는 수행(無所求行)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오랫동안 미혹하여 곳곳에 탐내고 집착하는 것을 구함()이라고 이름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참성품을 깨달으니 이치로서 속세를 저버리고 마음이 편안하여 아무 것도 함이 없다(安心無爲). 형체를 따라 운전하되 삼라만상이 다 공()이라 아무 것도 바라지도 않고 즐기는 것이 없다. 공덕(功德)과 흑암(黑暗)이 항상 서로 따르고 쫓는다. 삼계(三界)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마치 불타는 집(火宅)과 같고, 몸이 있으면 모두 괴로움이라 어느 누가 편안하겠는가? 이것을 요달(了達)하기 때문에 모든 육도의 존재(諸有)를 버리고 생각을 쉬어 구하는 것이 없다. 경에 이르되 구함이 있는 것은 모두 괴로움이고, 구함이 없는 것이 즐거움이다라고 했다. 그러므로 구함이 없는 것이 참으로 도의 행(道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로 구하는 것이 없는 수행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 공덕(功德) : . 선업의 과보. 흑암(黑暗) : 죗값. 악업의 과보. 선이 악이 서로 따르고 쫓으니, 선이 악으로 바뀌고 악이 선으로 바뀌어 모두가 무상하다는 뜻이다.

四稱法行者性淨之理目之為法信解此理眾相斯空無染無著無此無彼經云法無眾生離眾生垢故法無有我離我垢故智者若能信解此理應當稱法而行

넷째 법에 따르는 수행(稱法行)이라는 것은, 자성이 청정한 이치(性淨之理)를 법이라고 한다. 이 도리를 믿고 이해하면 모든 상()이 공()한지라 번뇌에 물듬도 없고(無染) 집착도 없으며(無著) 이것도 없고(無此) 저것도 없다(無彼). 경에 이르되 법에는 중생이 없으니 중생의 때(衆生垢)를 떠났기 때문이다. 법에는 가 없으니 의 때(我垢)를 떠났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지혜로운 자는 능히 이 도리를 믿고 이해하여 마땅히 법에 따라 행하여야 한다.

法體無慳於身命財行檀捨施心無悕惜達解三空不倚不著但為去垢稱化眾生而不取相此為自行復能利他亦能莊嚴菩提之道檀施既爾餘五亦然為除妄想修行六度而無所行是為稱法行

법 자체에는 아낌()’이 없으니 보시바라밀로 몸()과 목숨()과 재물()을 버리고 남에게 베풀되 마음에 아낌이 없다. 삼공(三空)의 도리를 통달하여 의지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오직 아낌의 때()를 제거하기 위하여 중생들에게 보시하되 상()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행(自利行)이고 다시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利他). 또한 능히 깨달음의 도(菩提道)를 장엄한다. 보시바라밀이 이미 이런 것과 같이 나머지 다섯 바라밀도 역시 이와 같다. 망상을 없애기 위하여 육바라밀을 수행하지만 아무 것도 행한 바가 없다(無所行). 이것을 칭법행이라고 말한다.

*():본래 이입(理入)과 행입(行入)금강삼매경에 나온 법문이다. 이 글 끝에 금강삼매경의 법문을 인용하니 참고하기 바람. 삼공(三空) : 아공(我空), 법공(法空), 구공(俱空) 또는 보시를 할 때 베푸는 자도 공하고, 받는 자도 공하고, 보시물도 공하다고 해서 삼공이라 함.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moon4758@naver.com

 

 

  

 

기사입력 : 2021-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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